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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말씀

공의로 통치하는 왕, 예수 그리스도

2016년 09월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본문 : 마태복음 1장 1절~9장 38절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분으로, 신약의 하나님은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분으로 그 성품을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특히 마태복음을 묵상하면 이런 오해는 풀리게 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 초대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기록됐으며,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에 있고, 그 가운데 서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핵심적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그 핵심 주제는 바로 ‘의’(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의인(1~2장)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합니다(1:1).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고, 다윗의 자손이라 함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14’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규정된 예수님의 족보는 곧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을 최종 목적지로 해서 흘러왔음을 보여 줍니다(1:17).
누가복음에 비해 짧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하는 ‘의’(1:19; 창 15:6)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함께하심’(1:23; 삼하 5:10)이라는 주제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의로움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의로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곧 ‘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의는 조금 다릅니다. 마리아의 잉태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 했던 요셉의 행동은 율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마리아를 정죄하지 않고 허물을 덮어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평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참된 의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즉, 율법에 대해 많이 알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지키기 위해 각종 규례를 만드는 것이 의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이는 동방박사가 찾아온 사건에 의해 명백히 드러납니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러 왔지만, 그들은 어디서 그리스도가 나실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어떻게 예언됐는지 잘 알면서도(2:4~6) 정작 동방박사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찾아 경배하러 오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알지만 그에 합당한 실천이 없는 위선자들은 결국 헤롯과 같은 악한 왕의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가정을 애굽으로 인도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는 사람은 ‘요셉’입니다(2:13). 마치 창세기에서 야곱(이스라엘)의 가정이 요셉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 들어갔듯이, 예수님께서도 요셉의 인도로 애굽으로 들어가셔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현하십니다.
헤롯은 출애굽 당시 바로가 남자 아기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했던 명령(출 1:22)과 같은 2세 이하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태복음은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겪었던 모든 역사를 친히 경험하심으로써 함께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 되셨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아들(3~4장)
세례 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는데(3:2), 이후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셨습니다(4:17). 이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선포가 하나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의’라는 주제가 제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십니다(3:15). 이는 이스라엘이 겪었던 역사를 그대로 겪으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순종에 실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공하는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금식하시며 시험을 받으신 것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나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며 여러 시험을 통과했던 것의 재현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시고(3:17),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시험합니다(4:3, 6).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리에서 그 역사를 다시 쓰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기’를 원하셨고(신 32:4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것은 예언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4:12). 이제 예언이 실현될 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을 본거지로 삼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룸이었고(4:14~16), 그곳에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며, 전파하고 고치는 사역을 이어 가시자 수많은 무리가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셨다”라는 말은 천국, 즉 새로운 이스라엘의 새 질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의 처음(4:23)과 마지막(9:35)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된 의로움이란 무엇인가(5~7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후에 시내 산에 임하셔서 율법을 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5:1; 출 19장). 예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을 ‘하늘의 나라’라고 칭하셨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기에 쓰신 표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이 받을 복은 세상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선언하시며 새 율법을 시작하십니다(5:1~12).
과거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출 19:5~6)로서 부름을 받았듯이, 천국 백성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5:13~16).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준수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천국 백성의 행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수준보다 훨씬 더 나아야 했습니다(5:17~20).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십계명과 율법의 조항들을 언급하시되 그 조항들이 갖고 있는 참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살인, 간음, 거짓 증언, 형벌 등의 도덕법(5:21~48), 구제, 기도, 금식 등 경건생활(6:1~18), 재물에 대한 가르침(6:19~34), 사회생활에 대한 가르침(7:1~12)이 주어지고, 그 결론은 “열매로 알리라”입니다(7:16, 20).
단지 알고만 있을 뿐 실천하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과 같습니다(7:26~27).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위선임을 고발하시고(7:21~23), ‘율법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의’라고 가르치십니다.


의로운 왕의 통치(8~9장)
이사야 선지자가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사 32:1)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 다윗의 후손은 곧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하시고(8:2~3),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이 쫓겨나리라는 예언까지 하시며(8:10~12), 열병에 걸린 여인의 손을 만지시는(8:15)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인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유대인은 모든 부정을 제거하고 이방인을 몰아내는 왕을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차별 없이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십니다.
이는 결코 아무나 다 받아들이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은 물론, 기존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 따르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8:20~22).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기대에 어긋났다기보다 그 기대를 훨씬 뛰어넘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입니다(8:2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는 것은 귀신들뿐이었습니다(8:29).
예수님께서는 단지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는 참 제사장이셨습니다(9:2). 예수님께서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하시며(9:9~13), 종교적 의무보다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기를 선택하십니다(9:14~15). 분명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기존 관념에 맞는 분도, 기존의 질서를 보존하거나 강화하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새 부대의 새 포도주와 같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9:17).
천국의 혜택을 얻는 조건은 ‘오직 믿음’입니다. 방금 죽은 딸을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시리라고 믿은 관리(9:18),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으로 믿었던 혈루증 앓던 여인(9:20~21),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두 맹인(9:27)은 모두 그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져 천국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권세를 힘입고 있다고 비방합니다(9:34). 이처럼 기존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무리들의 참된 ‘목자’이자, 추수하는 일꾼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9:36~38). 이후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참된 일꾼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깊어지고 완전해질 뿐,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들을 만나시던 방식 그대로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묵상을 통해 변함없는 주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Vol.140 201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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