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이야기 김예성 목사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문자지만,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던 시절에는 쉬운 한글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먼 옛날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사람들이 전파한 기독교는 한국인의 문맹률이 낮아지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어요. 그 이유는 바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었어요. 성경은 어떻게 해서 한글 교육의 판도를 바꾸었으며, 이 과정에서 귀하게 쓰임받은 레이놀즈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포기하지 않은 열정, 한국으로 가는 길을 열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는 1867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태어났어요. 언어에 특별한 소질이 있던 레이놀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한국어 성경 번역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1891년, 청년 레이놀즈는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한국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도 선교사로 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그는 자신이 소속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를 찾아가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선교부는 “그런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할 어떤 계획도 없다”라며 거절했어요.
하지만 레이놀즈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선교사>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로 한국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알렸어요. 결국 선교부는 레이놀즈와 테이트, 전킨 등 일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고, 이들은 1892년 11월 4일, 제물포(인천)를 통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어요.
레이놀즈의 재능과 열정, 한국어 성경을 완성하다!
레이놀즈 선교사님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어요. 말이 잘 안 통하는 답답함을 무릅쓰고 한국인과만 대화했고,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길거리에 나가 전도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6개월 만에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고, 레이놀즈 선교사님의 재능을 눈여겨본 사무엘 모펫 선교사님은 레이놀즈 선교사님을 성경 번역 위원으로 추천했어요.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지금과 같은 공인된 하나의 성경이 없어서, 사람들이 제각각 번역한 성경을 사용했어요. 신학적 오류도 있었고,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해 성도끼리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지요. 그래서 모든 성도가 함께 볼 수 있는 성경을 번역해야 했어요.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무척이나 긴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한국어가 뛰어나고 신학 지식 또한 탁월한 레이놀즈 선교사님의 합류는 천군만마와도 같았어요. 레이놀즈 선교사님은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김필수 선생님을 비롯해 이승두, 김정삼 선생님 등의 도움을 받아 성경 번역에 매진했어요.
오랜 시간 수없는 토론과 수정이 이어진 결과 1906년, 한국 최초로 공인된 신약성경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어요. 또한 레이놀즈 선교사님은 1910년 구약성경 번역까지 완료했어요. 그뿐 아니라 번역된 구약성경의 오류를 다듬는 개정 작업에까지 참여했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구약성경의 형태는 레이놀즈 선교사님이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교회, 어둠 속 등불로 우뚝 서다
레이놀즈 선교사님이 참여한 성경 번역 위원회의 성경은 빠른 속도로 각 교회에 퍼져 나갔어요.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을 수 없었던 하층민은 주일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을 수 있었어요. 한글 번역 성경은 출판계를 뒤흔들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자, 다양한 한글 책 또한 더욱 널리 보급되었어요. 그러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폭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몰려들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사회에 헌신했어요. 교회는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은 한민족에게 등불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었어요.
이처럼 레이놀즈 선교사님의 재능과 열정은 한국이 변화되는 데 기초로 쓰임받았어요. <큐티프렌즈> 친구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무장해, 레이놀즈 선교사님처럼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받게 되길 소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