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오정호 목사_ 새로남교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디사이플>에서 기획한 주제 ‘은혜를 구하는 사역자, 은혜를 전하는 제자가 되자!’에 내가 선택의 은혜를 누리게 됐다. 지상의 모든 사역자는 은혜에 대해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은혜로 부름받았고, 은혜로 파송받았으며, 오직 주의 은혜로 사역하기 때문이다. 내 짧은 글을 통해 먼저 나 자신이 저 놀라운 은혜의 대양(大洋)에서 한 춤이라도 ‘은혜의 은혜 됨’을 퍼 올리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글을 쓴 나 자신이나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은혜의 폭포수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은혜로 충만한 교회
내가 섬기는 새로남교회는 은혜로 충만하다. 현재 새로남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우들 가운데 ‘은혜’라는 이름을 가진 교우는 47명이다. 지금은 떠났지만, 한때 우리 교회에 몸을 담았던 교우들 75명까지 합하면 122명이다. 한 지역 교회에 122명의 은혜가 몸담고 있으니 어찌 은혜로 충만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나서 각각의 공간에 이름을 부여할 때 글로리홀, 그레이스홀, 글로벌홀로 명명했다.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없고, 은혜 없이는 열방을 가슴에 품을 수 없다는 소원과 절박함이 묻어 있는 이름이다. 심지어 우리 교회에서 두 부서로 운영되는 고등부 명칭이 ‘코람데오’(Coram Deo)와 ‘헤세드’(Hessed)다. 청소년 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살기를 원하는 담임목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다.
우리 교회는 작년에 교회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으로 “Amazing Grace”(놀라우신 은혜)라고 전체 주제를 잡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발자취를 세 권의 책에 담았다(Amazing History(역사), Amazing Ministry(사역), Amazing Saeronam(새로남)). 나는 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지역 교회인 우리 교회가 설 수도, 앉을 수도, 뻗어 갈 수도, 유지될 수도 없음을 말이다. 이 사실을 앞으로도 계속 절박하게 알아 갔으면 좋겠다.
은혜란 무엇인가?
신학사전(Baker’s Dictionary of Theology)에서 파커(T.H.L Parker)는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를 근거로 구약에 나타나는 은혜의 개념을 정리했다. 곧 신약의 ‘은혜’에 해당하는 카리스의 의미와 일맥상통한 은혜의 개념을 ‘헨’과 ‘헤세드’로 규정했다.
그는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헨’으로 표현했다. 이는 전혀 누리거나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호의다. ‘헤세드’란 말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나 자비하심으로 이해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관련한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는 단어는 ‘카리스’다. ‘카리스’는 ‘기쁨’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신약에서 ‘카리스’는 ‘헨’이나 ‘헤세드’와 연관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이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를 예로 들 수 있다. ‘카리스’가 ‘헤세드’와 연관한 예는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는 은혜의 개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은혜를 이해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은혜의 본질은 대가 없이 거저 주심에 있다. 진실로 자범죄와 원죄로 말미암아 저주와 사망을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당해야 하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은혜는 유일한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처절하게 이뤄지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입문할 수 없다. 다음은 파커가 내린 은혜의 정의다.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결정이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부터 베풀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는 전적 무능력자이다. 은혜는 율법의 행위와 정반대다.”
주님의 은혜만을(Sola Gratia!)
올해는 은혜의 의미가 절박한 종교 개혁 500주년이다. 우리 시대에 500주년을 맞이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교회 개혁의 정신을 일반적으로 5S(Sola Scriptura(오직성경), Sola Gratia(오직 은혜), Sola Fide(오직 믿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로 표현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김광열 교수는 종교 개혁 신학해설 시리즈 『오직 은혜만으로』에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성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타락한 인간의 모습들 속에서 그들은 오직 은혜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도, 그들은 오직 은혜로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초대받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 속죄 사역을 생각해 볼 때에도 오직 은혜만으로 우리 죄가 해결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넷째, 성령님의 사역 방식을 봐도, 죄인은 오직 은혜만으로 회복의 은총을 덧입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섯째, 중생 이후 신자의 삶의 모든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므로, 밀려오는 사탄의 온갖 시험과 도전들 앞에서도 신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은혜, 그 충격적인 경험
팀 켈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말하다』(부제: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서 은혜를 충격적인 경험으로 묘사했다.
사역자로 부름받은 목회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에 눈뜬 모든 이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충격을 경험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확실한 답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게 본질적으로 테크닉,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우리 손에 달렸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는 데는 두말이 필요 없다. 예수님께서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이들은 어김없이 지난날을 돌아보며 주님의 은혜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녔으며, 결국 새로운 현실에 눈뜨게 했음을 인정한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타락한 실체와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폭발적인 은혜가 한 점에서 만났다. 여기서 선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또는 진실해지려는 노력은 도리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막상 하나님의 은혜로 일이 벌어지고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사실은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존 웨슬리를 비롯해 수많은 영적인 거장들의 전기에서, 또는 삶이 백팔십도 달라진 우리 교회 교인 수천 명의 간증을 통해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죄인으로서 경험한 감격을 담아낸 자기 고백이자 순례기다. 번연은 그 감격을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1666))로 담아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자체가 놀라운 은혜다.
어둠 후에 빛(Post Tenebras Lux)
‘Post Tenebras Lux’는 ‘어둠 후에 빛’이라는 의미다. 개혁자 존 칼빈의 도시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 개혁비에 새겨진 문장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과거 한때 주님 밖에 있었다. 물론 은혜 밖에, 구원 밖에 있었음은 자명하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때’와 ‘이제’를 구분해 제시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심령과 사도 바울의 심령의 공통분모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에 분수령이 됐다는 확실한 사실이다. 드디어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빛이 비췄다.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의미가 새로워졌다.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혁자 루터에게도 어둠 후에 빛(Post Tenebras Lux)이 이뤄졌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스칼라 산타(Scala Santa, 거룩한 계단: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판결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빌라도 총독관의 28개의 계단.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온 것)를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루터는 자신의 영혼을 연옥에서 구원하고 싶은 갈망으로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라틴어 주기도문을 반복하며 계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그에게 참된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루터가 로마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접하고 심령에 변화를 경험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동시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라는 말씀이 루터의 영혼에 부딪쳐 왔다.
루터는 “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는 마치 거듭나 열린 천국 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전가된 일을 경험하기에 새롭고 의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한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확신에 도달했다. 그는 고백한다.
“주 예수님, 주님은 나의 의가 되시지만, 나는 주님의 죄입니다. 주님은 내 짐을 지고 가셨지만, 주님의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아닌 것을 스스로 짊어지셨고 내가 아닌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드디어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자신을 확신하고 어둠 끝에서 생명의 빛을 받았다.
배은망덕에서 결초보은으로!
나는 내 속에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DNA가 꿈틀거림을 본다. 동시에 결초보은(結草報恩)의 DNA가 춤추는 것을 본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에 대한 통찰력 있는 팁을 제공한다.
“은혜란 분명 놀라운 말이다. 과연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세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혜에 목말라 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 작곡된 지 200년이 지나서 각종 순위 차트에 진입하는 것도 놀랄 일이 못 된다.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세상이 믿음의 닻을 내리기에 은혜만큼 좋은 곳은 없다!”
리처드 니버는 말했다.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여태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이가 있을 때 발생한다. 어찌된 일인지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받은 기관인 교회 안에도 은혜가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내 삶도 얀시의 고백과 니버의 지적 가운데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님의 종으로서 내 모습과, 목회자로서의 내 모습 사이에 괴리는 과연 없는가? 분명한 것은 배은망덕한 시대정신을 역류해 결초보은의 마음을 끝까지 견지하고 싶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은혜는 반드시 감사로 열매 맺는다. 그 감사의 농도와 깊이와 넓이는 은혜에 대한 각성의 농도와 깊이와 넓이에 맞닿아 있다.
서두에 썼던 대로 우리 교회는 은혜로 충만하다. 단지 이름만이 은혜가 아니라 영혼과 삶의 현장이 송두리째 예수님의 은혜로 점령당하고, 통치받으며, 압도당하는 성도들과 주님의 제자들이 구름 떼처럼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최선봉에 오직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사역하는 나 자신이 서는 것 또한 한시라도 잊지 않기를 소원한다.
“주여! 은혜받은 자답게 살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만을(Sola Gratia) 전파하는 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오정호 목사는 1994년 사분오열돼 갈등하는 대전 새로남교회에 부임해 오로지 제자훈련 목회 철학을 바탕으로 지난 30여 년간 한 길을 달려왔다. 현재 전국 CAL-NET 이사장이며, 교회갱신협의회 공동대표, 국제개발대학원 재단이사장, 총회 칼빈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