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12년 09월

특집1 * 故 은보 옥한흠 목사 2주기,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를 통해 청년사역자로서 옥한흠목사를 재조명하다

특집 우은진 기자

 

청년들을 사랑했던 옥한흠, 참 제자의 삶을 도전하다
- 현재 한국 교회 리더들 중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이 다수 차지

 

옥한흠 목사는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를 세 번 인도하며, 내수동교회 청년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바로 그들의 삶에 터닝 포인트가 되도록 원색적인 복음을 전한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를 이끄는 리더들 다수는
바로 30여 년 전 청년시절 옥한흠 목사와의 만남이 삶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랑의교회 후임이 된 오정현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
부산 부전교회 박성규 목사를 비롯해 연변과기대 조현직 선교사, 위클리프선교회 조경자 선교사, 국방대학원 이상진 교수 등이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으로, 이들은 현재 내로라 하는 한국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국 교회 대학부 부흥의 원조 사역자
옥한흠 목사는 선교단체의 전유물이었던 제자훈련을 개 교회에 도입해 부흥을 일군 장본인이다. 그는 1970년부터 1975년에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성도교회 대학부를 제자훈련을 통해 부흥시켰고, 말 그대로 친교 위주의 활동만 하던 대학부 청년들에게 말씀훈련을 시키며 교회의 공동체성에 눈뜨게 하는 한편, 제자 삼는 사역, 복음전파 사역에 헌신하도록 했다. 이 모두가 기존 대학부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옥 목사는 오늘날의 대학부, 체계를 갖춘 대학부다운 대학부를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1978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강남 은평교회(현 사랑의교회 전신)를 개척하기 3달 전 분주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 강사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미 성도교회 대학부 전도사 시절부터 청년 사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 교회 대학부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담 사역자는 아니었지만 미국 유학 중 쌓인 지적인 날카로움과 폐부를 찌르는 듯한 세 번의 수양회 설교 메시지를 통해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들의 영육을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대학부 출신들은 옥 목사의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빈곤한 정체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기독교가 풍성할 수 있으며, 복음의 놀라운 세계에 처음으로 눈뜬 기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한마디로 내수동교회 대학생 다수가 이때 영혼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청년들은 그때까지 원색적인 복음 전달과 구원의 확신을 성경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로 전해준 목회자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옥 목사는 성도교회에서 말씀과 훈련 중심적인 청년 사역을 했던 경험이 있었고, 미국에서 갓 돌아와 리프레시(refresh) 했다. 송추수양회를 통해 내수동교회 대학부에서는 한때 ‘리프레시’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수양회에서 세 번 옥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밤새 통회자복 하는 형제들,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자매들이 늘어났다.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겨우 20~30여 명이 모이며 고등부에 다니던 학생들이 대학부에 올라와 ‘형’, ‘동생’하며 교제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1978년 대학부 송추수양회에서 옥한흠 목사의 변혁적인 설교는 청년들의 패러다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옥 목사는 1978년에는 ‘사랑’, 1979년에는 ‘성장’, 1980년에는 ‘생명’이라는 주제로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에서 말씀을 인도하며 젊은이들에게 ‘저런 분이라면 인생을 걸 수 있겠다’라는 확신을 주었고, 그런 확신은 곧 그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이때를 계기로 내수동교회 청년들은 친교 위주의 대학부 활동을 말씀훈련과 선교활동으로 전환하며,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흥의 핵심 1세대가 되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교회 위치도 부흥하기 힘든 위치에다가 20~30명이 겨우 모이던 이름 없는 교회의 대학부였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성인 성도 수에 비례해 청년 수가 훨씬 많은 150~200명까지 부흥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이런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영향을 서울침례교회 대학부가 탐방을 통해 많이 배워갔다. 또 그 바통을 사랑의교회 대학부, 온누리교회 대학부 등이 이어가 한국 교회 안에 어느덧 청년 사역의 부흥이 꽃피게 되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세 번의 수련회 인도
옥한흠 목사가 인도한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 중 첫 번째 수양회는 송추수양회였다. 1978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3)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7회 여름수련회는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부흥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대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당시 갓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교회 개척을 준비 중이었던 옥한흠 목사는 성도교회 대학부 부흥으로 이미 청년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그런 그를 수련회 강사로 모신다는 점에서 수련회 개최 전부터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들의 기대심을 한껏 고조시켰다.
일단 외모부터 장발에 청바지를 입었고, 선글라스에 삐딱하면서도 지적인 풍모를 지닌 옥 목사의 겉모습이 청년들에게는 신선한 라이프스타일로 다가왔다. 특히 기존의 샤우팅이 난무하고 리스닝 스타일의 설교에만 길들여진 청년들에게 옥 목사의 ‘생명, 교제, 기쁨’(요일 1:1~4)이라는 주제로 한 원색적인 복음 메시지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옥 목사의 스마트한 외모와 지성적이면서도 명쾌한 설교가 청년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특히 송추수양회에서는 옥 목사의 요한일서 강해를 통해 복음의 능력을 발견한 청년들이 생애의 헌신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참석했다가 삶이 송두리째 바뀐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들 중에는 훗날 선교사와 목회자들로 한 시대의 쓰임을 받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두 번째 수련회는 1979년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임마누엘기도원에서 “성장으로 나아가라”(히 6:2)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송추수양회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값없이 얻은 사랑에 대해 사자후를 토했던 옥 목사는 두 번째 수양회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한 제자도’를 강조했다.
성숙이나 성장은 생명을 떠나서는 뿌리 없는 허약하고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만다며, 양육의 본질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롬 8:29), 즉 ‘성장’으로 삼았다. 이에 도전을 받은 청년들은 더욱더 제자훈련을 통해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고, 말씀훈련에 열심을 품게 되었다.
세 번째 옥 목사의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 인도는 1980년 양평 십자수수양관에서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앙평수양회에는 강남 은평교회 대학부 청년들 10여 명도 함께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옥 목사는 앙평수양회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룬 청년들에게 다른 영혼의 생명을 건지도록 도전했다. 생명의 확신과 기쁨을 경험한 청년들이 십자가를 붙잡고, 생명을 증거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70년대 후반 10·26사태와 5·18 등 시대적으로 암울한 상황에 휴교령이 내려진 캠퍼스로 인해 교회에 매일 모이게 되었으며, 이것이 영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40대 초반에 강남에서 목회를 시작해 이름을 얻은 옥한흠 목사에 이어 홍정길, 이동원 목사 등 당대 유명한 목회자들을 연이어 수련회 강사로 초빙해 영적으로 큰 수혜를 입었다.
변변한 기독교 서적이나 좋은 책자를 찾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한국 교회 부흥의 초석이 된 말씀의 대가들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들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청년들이 복음의 ‘증인들’이 되다
실제로 현재 한국 교회 대학부의 모든 체계와 외형의 모습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한국 교회 청년, 대학부의 모판이라는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말씀과 기도, 복음 전파라는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을 부여잡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쳤다.
무엇보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들에게 ‘증인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계기도 1978년 송추수련회 때 옥한흠 목사가 전해준 제자훈련 마인드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날을 계기로 제자훈련에 불이 붙은 젊은이들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생애 헌신을 다짐했으며, 그들을 통해 폭발적인 영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부흥은 당시 선교단체에 매력을 느끼던 대학생들을 대거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제자훈련이 대학부 부흥에 불을 댕겼다면, 그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땔감을 제공한 것은 당시 박희천 담임목사(현 원로목사)였다. 박희천 목사는 30년 전에 이미 대학부 재정을 독립시켰고,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교재를 교회 안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당시 대학부 송인규 전도사(현 합신신대원 교수)도 우리나라에 아직 출간되지도 않았던 외국의 기독교 원서들을 번역해 주보에 실어 대학생들의 지적인 욕구와 신앙 성장을 자극했다.
또한 실질적인 대학부의 지도간사 역할을 했던 오정현 엘더(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는 옥한흠 목사를 수양회 강사로 초청하고, 당시만 해도 신학 훈련을 받기 전인 대학생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 오후 대학부 집회에서 인상적인 7분 메시지를 전해 대학부의 영성을 발전시켰으며, 옥 목사의 영향을 받아 ‘생명, 교제, 기쁨의 날’(이하 생고기) 전도집회 기획 등 혁신적인 리더십으로 대학부 청년들을 진짜 ‘증인들’로 세워나가는 데 중심역할을 했다.
그는 매주일 새벽 6시부터 두 시간씩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용산역 건너편 현 중앙대병원에서 철도사고를 당한 중환자들을 위해 복도에서 찬양과 병실 전도로 위로하고, 돌보는 사역도 실질적으로 인도했다.
당시 한국 교회 안에서는 대학생들 사이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내수동교회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방 출신 유학생들에게는 꼭 거쳐 가야만 하는 교회가 바로 내수동교회 대학부였다. 당시 오정현 엘더는 용산에 오래된 아파트를 얻어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처럼 지방 출신 대학생 10여 명과 함께 신앙공동체생활을 하기도 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캠퍼스나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 양육을 하면서 영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증인들’(One Man Vision)이라 자처했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아지면 교회 자체가 젊어지고, 생동감이 넘치게 된다. 실제로 이 시기에 배출된 순수와 열정으로 뭉친 한 세대를 주님께서는 한국 교회의 리더들로 사용하셨다.
현재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30여 년 전 옥한흠 목사가 청년들에게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고, 그 청년들이 헌신적인 증인들로 세워졌듯이,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새벽이슬 같은 순수한 젊은 증인들을 배출해 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30년 후 한국 교회의 미래가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우은진 기자>

옥한흠 목사 글 발췌

제자도의 성숙함 (discipleship in maturity)
내수동교회 대학부 ‘증인들’이라는 젊은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먼저 크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수련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문제의식을 분명히 해두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영적인 궁핍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문제의 해결이 가능합니다. 생명(the life in Christ)에 관해서는 작년에 언급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그 생명의 ‘성장’에 주안점을 두려고 합니다. 대신 리더들이 여러분의 상담에 응하고, personal follow-up을 계획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서로 나누며, 그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필요불가결한 교육의 초점이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 받는 일이야말로 젊은이 선교의 지상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수련회는 성장하는 제자의 인격에 관한 것들과 성장한 제자의 최고 권위인 성경에 관한 연구(성경의 권위, 영감, 능력, 성경 앞에서)와 성장하는 제자를 위한 중요한 원리를 각각 새벽, 오전, 밤 시간에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리프레시(refresh)하시고 원더풀(wonderful)한 하나님을 만나십시다. 이제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시시하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제자)의 삶도 시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처럼 증인들의 삶도 위대할 것입니다.
-1979. 7. 2. 한 없이 흠이 많은 옥이 그리스도 안에서

 


내수동교회 대학부 출신들

1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후 내수동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드리며 영성과 성실함을 인정받고, 대학부 시절 평신도로서 대학부 엘더인 지도간사로 사역했다. 당시 그는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지만 영감 어린 찬양과 기도회 인도, 달변으로 주옥같은 7분 메시지를 전달하며 많은 대학생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부흥시킨 핵심인물로서, 당시 옥 목사를 송추수양회의 강사로 섭외했고,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제자 삼는 사역을 하도록 중심역할을 했다.

2 이성주 목사(미국 메릴랜드 열린문교회)
오정현 목사와 같은 또래로 초창기 내수동교회 부흥의 핵심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오정현, 이종현 형제와 함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불리면서 초창기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기틀을 잡았다. 이후 누가회 대표간사, 할렐루야교회, 볼티모어 벧엘교회를 거쳐 현재 미국 메릴랜드 볼티모어 열린문교회를 개척해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3 오정호 목사(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는 형인 오정현 목사에 이어 대학부 전도사가 되어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흥의 절정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내수동교회는 대학부 출신 청년들에게 전임 사역을 맡기는 것이 전통인데, 오정호 목사(81년)는 바로 내수동교회 대학부 담당 전도사로 사역했다. 이후 그는 사랑의교회 대학부 전임사역자로서 대학부 성장을 위해 다시 한번 사역했으며, 현재는 대전 새로남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제자훈련 사역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4 박성규 목사(부산 부전교회)
대전에서 올라와 1982년부터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오정현 목사와 함께 라브리공동체 생활도 했다. 이후 남가주 사랑의교회 부목사를 거쳐 현재 부산 부전교회에서 제자훈련으로 건강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5 화종부 목사(남서울교회)
부산에서 올라와 1986년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를 거처 현재 이철 목사 후임으로 남서울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6 송태근 목사(삼일교회)
오정현 목사의 동기였지만 대학부 활동에 좀 늦게 발동이 걸렸던 그는 1~2년간 역동적으로 대학부 활동을 했으며, 뒤늦게 총신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이후 유학을 다녀와, 전통 교회였던 노량진 강남교회를 제자훈련으로 새롭게 혁신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2012년 7월 이후 삼일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7 고준원 장로(사랑의교회 장로, 치과의사)
내수동교회 고등부 출신으로 대학부 소그룹 리더로서 조용히 뒤에서 섬기는 편이었던 그는 친목단체였던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변화시키고자 1976년 성도교회 대학부를 롤모델로 삼고 탐방을 가기도 했다. 옥 목사의 송추수양회 설교를 듣고, 실천적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옥 목사는 너무 깔끔하고 단정해 가까이 다가서기 힘들었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매력이 넘치는 분,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분으로 각인되었다.

8 조경자 선교사(위클리프, GBT)
이화여대 출신으로 내수동교회 대학부 수양회에 강제로 끌려와 참석한 후 수양회 마지막날 선교사로 헌신했던 인물이다. 성경번역선교사로서 파푸아뉴기니의 성경을 번역하였고, 지금은 호주에서 한인번역선교사들을 동원하는 선교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9 서재석 대표(Young2080)
내수동교회 고등부 출신으로 당시 대학부 소그룹 리더로 섬겼던 서재석 대표는 <증인들>이란 대학부 주보를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 <증인들>은 30년 넘게 지금까지 1,500호 이상이 발행되고 있다. 당시 문서선교에 대한 비전을 받아 지금까지 IVP와 복음과상황, Young2080 <큐티진> 사역에 헌신하고 있다. 그는 옥한흠 목사의 세 번의 수양회 설교를 통해 지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말씀 중심, 생각하는 신앙을 본받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0 이상진 교수(국방대학원 경영학과)
부산에서 올라와 1977년부터 내수동교회에 출석한 그는 옥한흠 목사의 수양회 설교를 들은 후, 구원의 확신과 말씀의 감격에 빠져 살게 되었다. 인간적 친분이 아닌 예수의 사랑과 공동체성을 느끼게 되었고, ‘생고기 전도축제’를 통해 영혼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 내수동교회가 부흥할 만한 교회 위치도 아니었지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대학부가 부흥하고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이 배출되었다고 회상한다. 현재 그는 국방대학원 교수와 남서울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11 조현직 선교사(전 연변과기대 컴퓨터공학과)
연세대 건축학과에 다니던 그는 송추수양회에서 변화 받아 선교사로 헌신했다. 옥 목사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그는 옥 목사가 수양회에 오자마자 본인은 중앙에 앉고서 주변의 모든 청년들에게 손을 얹고 옥 목사 자신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는, 성령께 의지하는 모습에 반하여 신앙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미국 유학 중 1992년 연변과기대가 창립되자 초창기 교수로서 20년 동안 헌신했다. 그는 제자훈련의 한 길을 간 옥 목사의 지조가 롤모델이 되어 자신 역시 연변과기대에서 헌신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언젠가 옥 목사가 고기를 구워주며 “수고했다”고 격려해주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며 그리워했다.

12 유건호 교수(경희대 물리학과)
1979년부터 대전에서 올라와 내수동교회 대학부에 다녔고, 선배들로부터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정신이 형성된 것”은 78년 송추수련회, 옥한흠 목사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실질적인 대학부의 기틀을 놓은 1세대라기보다는 1세대의 후혜를 입은 세대이다.

13 이종현 성도(LG)
내수동교회 고등부 출신으로 대학부에 진학한 뒤 네비게이토에서 훈련받고, 선교단체의 제자훈련을 내수동교회 대학부에 도입해 말씀훈련에 집중하도록 했다.

14 진계중 목사(오산 사랑의교회)
내수동교회 고등부 출신으로 이성주, 이종현, 오정현 형제와 함께 동년배였으며, 믿음의 동지로 활동했다. 대학부 부흥기에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선교단체를 거쳐 오산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사역의 근원지, 영적 고향이다”
- 사랑의교회 오정현 담임목사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랑의교회 담임 오정현 목사이다. 이 시절에 일명 선파워(sun power)라는 별명이 생겼을 만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대학부 부흥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지금으로 치면 대학부 내에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스타였다. 오정현 목사로부터 20대의 순수한 열정으로 복음에 사로잡혔던 당시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부흥의 주역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 나는 가끔씩 내수동 그리운 언덕, 신문로 입구만 떠올려도 눈물이 난다. 내 사역의 근원지, 영적 고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중요성, 복음에 대한 열정, 평생 동역할 영적 동지들, 꿈과 비전, 말씀과 기도사역, 제자훈련과 성령사역 등 모두 이 시절에 배운 것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이후, 내수동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드리며 당시 담임목사님이신 박희천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목사님은 나의 부족한 영성과 성실함을 인정해주시고,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대학부 엘더인 지도간사로 세워주셨다. 그 어른의 포용력 때문에 대학부를 위해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대학부 엘더로서 7분 메시지, 철도병원 전도, 라브리 공동체생활 등 실험적 사역을 많이 하셨다 : 당시 평신도로서 대학부 엘더로 섬기면서 7분 메시지를 열심히 준비했다. 어릴 적 개척 교회를 하시던 아버지의 사역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라서인지 찬양과 말씀 준비를 즐겁게 감당했다. 그때는 젊었고, 순수했고,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선파워’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 같다. 밤새도록 성경을 토론하였다. 그리고 용산 중산아파트에서 대학생 10여 명과 라브리(L’abri) 공동체생활을 하며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쓰면서 성경의 참 공동체 생활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춥든지 덥든지 빠지지 않고 나간 용산 철도병원 환자 전도는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기신 모습을 직접 실천했던 몸부림이었다. 또 당시로는 접할 수조차 없었던 기독교 지성과 영성의 콘텐츠들을 대학부 주보인 <증인들>에 담았고, 산기도도 자주 다니며 영적 야성을 많이 키웠다. 
송추수양회에 옥 목사님을 직접 수련회 강사로 섭외했다 : 목사님이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사역하실 때부터 탐방하며 인연을 맺었으며, 그때부터 옥 목사님은 나의 영적 멘토가 되었다. 송추수양회를 위해 대학생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했는데, 그 결실이 옥 목사님의 수련회 메시지로 극에 달하게 되었다. 청년들을 사랑했던 옥 목사님을 통해 수양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회심하고 변화 받아 헌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후 강남 은평교회 개척예배에 내수동교회 대학부 청년 20여 명이 의기투합하여 축하 찬양을 드리기도 했다.
송추수양회 이후 ‘생명, 교제, 기쁨의 날’ 전도축제를 기획해 대학부가 배가 성장했다 : 송추수양회의 영향을 받아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 젊은이들이 ‘생고기’ 축제를 기획했다. 이 전도축제를 통해 많은 청년들이 구원의 감격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고, 말씀을 보고 훈련하는 사역에 집중하게 되어 내수동교회 대학부가 배가 성장하게 되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는 내게 영적 고향과 같다. 그리울 때 꺼내볼 수 있고, 힘들 때 그때의 기억이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때 함께 훈련받은 동기들과 후배들은 아직까지도 교제하고 있는 영적 동지들이다. 예수님께 평생을 걸겠다며, 함께 울고 웃으며 땀 흘렸던 예수의 증인들이다. 이런 대학부의 소중한 공동체 경험을 지금의 수많은 한국 교회 젊은이들이 체험해 영적 야성을 길렀으면 좋겠다.                                    <우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