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08년 02월

약함의 영성

특집 마르바 던Marva J. Dawn

변화하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영성

약함의 영성

 

 

한국 교회의 예배와 기독교 영성에 대한 관점은 지난 30년간 빠르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와 기독교인의 숫자가 감소하고,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세상 가운데서 줄어들고 있는 이때에 온전한 예배를 회복하고, 또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독교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국제제자훈련원과 IVF, 한국기독교학회는 지난해 8월 16, 17 양일간 세계 각지에서 예배와 영성에 관해 탁월한 저술로 기여하고 있는 마르바 던 박사를 초청해 예배와 영성 공개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우리 시대의 예배’와 ‘변화하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 영성’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 아래 진행됐으며, 전체 강의 중에 마르바 던 박사의 예배와 기독교 영성에 관한 주옥과 같은 강의를 <디사이플>에서 게재하고자 한다.

 

1강.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2강. 예배 지형도 그리기
3강. 보다 큰 이야기
4강. 멈추지 못하는 삶과 안식
5강. 약함의 영성
6강. 공동체 영성

 

마르바 던Marva J. Dawn 교수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Regent College와 Christian Equipped for Ministry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신학자, 저자, 음악가, 교육가로서 세계 각지에서 예배와 영성에 대한 강의를 해왔다. 한국에는 『안식』, 『고귀한 시간낭비』, 『희열의 공동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연약할 때 기뻐하라-약함의 신학』, 『우물 밖에서 찾은 분별의 지혜』 등의 책이 번역되어 있다.

 

 

약함과 낮아짐을 자랑하라
제가 살아오면서 발견한 것들 중 가장 흥분되는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11장 30절을 살펴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미국과 동일한 현상을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더 큰 힘과 권력을 갖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들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자신의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 시류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1장 30절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만약 무언가를 계속 자랑해야만 한다면, 나는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하리라.”
이것은 세상의 방식과는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겠다는 의미로,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현재 직장에서 가능한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산에 오르지 않고 오히려 내려오셔서 죽음이라는 가장 밑바닥까지 이르러셨습니다.
우리가 영성에서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계속 높아지기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낮아지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낮아지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것을 찾으라면 많이 있겠지만, 자랑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약한 사람이라는 것, 바로 그것을 자랑하겠다고 말입니다.

 

 

왜 약함을 주셨는가?
12장 7절에서는 바울이 자기의 약함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2:7).
12장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서 하늘나라를 보고 왔는지 말합니다. 7절에서는, 이 계시가 지극히 큰 계시였기 때문에 그로 인해 자신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쉽게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바울의 자세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역할 때 그 부분이 계속 걸림돌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는 걸림돌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오히려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바울은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자신을 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온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질병이나 고통, 어려움 등 고통의 근본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주권으로 비록 악이 만들어낸 고통과 슬픔과 문제일지라도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우리가 겪는 끔찍한 고통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가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에 대해서 우리가 통상 보이는 반응은 가능하면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고, 악의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며, 삶에 대한 통제력을 스스로 속히 회복시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약함 때문에 얻게 되는 유익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세 번 부르짖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던 것처럼 바울도 그렇게 간구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절).
우리의 약함 때문에 얻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꾸준한 기도 생활이 정착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하게 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 약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순종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9절은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당신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절a). 9절 전반부를 헬라어 성경에 의해 새롭게 해석해 보니,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의 능력, 바울의 힘이 종료되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새롭게 역사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내가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사실은 내 능력이 종료되어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구절입니다.
9절 하반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절 b).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와서 ‘머문다’ 또는 ‘산다(dwell)’는 말을 썼는데, 저는 ‘의도적으로 거처를 마련해서 그곳에서 산다(tabernacle)’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집짓고 산다는 ‘tabernacle’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는 ‘샤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샤칸이라는 단어는 ‘샤카이나’라는 단어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장막을 우리 가운데 짓고, 우리가 거주하는 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사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하나님의 장막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시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곳에 장막(샤카이나)을 치시고 머무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전이 나중에 파괴되자 이스라엘은 큰 슬픔과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 단어가 신약 시대에 와서는 ‘스키네’라는 단어로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주로 과거형이나 미래형으로는 사용되었고, 현재형으로는 단 한 번만 사용되었습니다. 과거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장막을 치고 사셨다는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속 거하셨음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을 번역하여 『The Message(메시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 구절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이웃으로 이사 오셨다”고 번역했습니다. 우리 옆에 하나님께서 텐트치고 함께 사시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직접 볼 수 있고, 더 친밀히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함 때문에 더 온전케 되고 강해진다
현재형으로 사용된 유일한 용례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후서 12장 9절 하반절에서 나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약하고 문제 있는 상황을 기꺼이 자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장막을 치고 들어오셔서 함께하시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오히려 더 온전케 되고 더 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에도,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온전히 장막을 치시고 집 짓고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계속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분에게 의지하며, 우리 힘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완전히 내려놓고 전적으로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토기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진흙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고, 단지 우리는 그 빚으시는 대로 빚어진 토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이 서신이 쓰인 당시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전도하려고 참 애를 많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아서 포기했더니, 그때서야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험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길을 비키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도록 할 때, 바로 그때서야 비로소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저는 너무 많이 경험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이제 10절로 가서, 사도 바울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10절a).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싫어하고 끔찍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자신은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 진심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분명히 자기의 고백이요 진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고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이 명확하게 나타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잘못되고 옳지 않은 상황들,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의 문화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권력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우리 힘을 내려놓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10절 하반부와 같은 말을 결론으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b).
약함의 신학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냥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삶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