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라는 작은 책에서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원장이었던 존 맥케이의 두 가지 관점, 길과 발코니의 시각을 소개하면서 고난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길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사람들은 길 위에서 목표를 추구하고, 위험을 겪으며, 혼신의 힘을 쏟는다. 길 위의 시각은 실제적인 고난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의 시각이다. 굽어진 길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가야 한다.
반면, 발코니는 위층 창문 앞쪽으로 튀어나온 자리로서 거리를 바라보거나 일출과 일몰이나 별을 감상할 수도 있는 곳이다. 맥그래스는 발코니의 시각을 신학자들의 시각으로 정리했다.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앞에 놓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떻게 이 길을 갔는지, 그리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고 있다.
신학자들의 관점은 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 길 위에서 겪고 있는 고난은 당사자들에게는 늘 새로운 일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세대를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들과 씨름해 왔다. 살리스버리의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신학자들은 과거에 이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며 통찰력을 정리해온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난쟁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 현실의 삶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길 위에 서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받고 재충전된 힘을 가지고 계속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그 위로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잠시 고통을 잊도록 돕는 진통제나 마약과 같은 선의의 거짓말이나 속임수이어서는 안 된다. 긍정의 힘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가르쳐서도 안 된다. 교회가 나누는 위로는 기독교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고난이 닥치고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들을 위로하고 새 힘을 가지고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도록 도울 수 있을까? 맥그래스는 신학이 고난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관점을 줄 수가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맥그래스는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다고 소개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고난에 괴로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가기로 결정하셨다. 십자가는 이 고난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하나님께서 발코니에서 직접 길 위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경험으로 알고 계시며, 가슴 아파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고난을 이기신 분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에 대해 이기셨고 고난을 승리로 바꾸셨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아직 고난의 길을 가지만 그 길에 승리와 해방의 기운이 감돌게 된다. 마치 전범 수용소에 갇혀있지만 단파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전세가 꺾였고, 곧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수용소의 분위기가 놀랍게 바뀌는 것처럼. 여전히 죄수의 신분이지만 적군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았고, 석방이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고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달콤한 사탕발림이나 진통제를 가지고 고난을 피해가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진리로 고난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