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05년 04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사역

발행인칼럼 오정현 목사

‘가이젠’이라는 일본 말이 있다. 한자로 개선(改善)을 의미하는 말인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통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외제차인 렉서스를 만드는 도요타는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세계 4위에 불과하지만, 순이익을 기준으로 하면 GM, 다임러크라이슬러, 포드, 폭스바겐의 순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기업이다. 이것은 그만큼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요타의 이시카와 사장은 이러한 도요타의 힘의 원천이 가이젠 정신이라고 단언한다.
가이젠 정신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 ‘매너리즘’이다. 가이젠 정신이 끊임없이 문제를 찾고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태도를 의미한다면, 매너리즘은 현실에 안주하고 습관적인 태도에 익숙한 자세나 경향을 말한다. 이 매너리즘은 목회자의 감각 또한 마비시킨다. 목회자는 누구나 매너리즘의 유혹을 받게 마련이다.
일단 매너리즘의 바이러스에 목회자가 감염되면, 가장 먼저 마비되는 것이 생명의식이다. 교인들의 영혼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목회의 창의성이 사라지고 변화에 대한 현실 감각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목사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것은 목회의 영성이 변질되고 열정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적으로 보면 목회에서 매너리즘을 방지하는 최선책은 부모를 찾는 갓난아이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만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매너리즘의 껍질을 벗겨 보면, 그 속에는 자만심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역에서 ‘이 정도 하면 됐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바로 목회자의 가슴이나 사역의 현장에 매너리즘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다. 
나는 나이에 비해 누구보다도 예배를 많이 드렸다고 할 수 있다. 가정예배에 관해서는 엄격하셨던 부친에 의해 날마다 예배를 드렸고,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에 나가야 했다. 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를 했기 때문에 여하튼 예배는 일상생활이 될 정도였다.
지금도 주일날 여섯 번의 예배를 드리니, 아마 나이에 비해 가장 많이 예배를 드리는 목회자에 속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칫하면 누구보다도 예배를 익숙하게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예배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처지에 있다. 
그래서 토요일 새벽강단에서 주일 예배 순서를 맡은 분들과 함께 기도할 때, 언제나 기도의 포문을 여는 제목이 있다. “주여, 내일 예배를 살려 주옵소서.”
어린아이처럼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이미 예배에서 생명이 떠나 있음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세상의 일에는 관록도 중요하지만, 목회사역이나 특히 예배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관록이다.
이것은 제자훈련도 마찬가지이다. 제자훈련을 몇 년 이상 하다 보면 차츰 형식적인 성경공부만 남고, 그 속에 변화와 성숙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제자훈련이 생겨날 수 있다.
매너리즘은 제자훈련을 오래하는 교회일수록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5년, 10년 제자훈련을 하면 나도 남들만큼은 한다는 자만심이 고개를 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내용은 사라지고 반질거리는 차돌처럼 겉은 매끄럽지만 정신은 죽은 제자훈련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훈련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3장 10절, 11절에 나타난 것처럼 자기 죽음의 선언이다. 사역에서 한번도 매너리즘에 빠진 적이 없는 목회자를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바울 사도를 들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목회 정신 앞에서 매너리즘은 전혀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제자훈련에서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바울처럼 자기 죽음을 선언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엎드리는 데 있다. 아무쪼록 사역의 경륜이 쌓이고, 소위 목회의 관록이 붙을수록,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더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 매너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늘 순수하고 생명력 있는 사역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