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23년 04월

기름부으심의 축적이 목회를 결정한다

발행인칼럼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오정현

1992년 미국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섬길 당시, 박희천 목사님을 모시고 ‘말씀의 재부흥’이라는 주제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날 저녁, 교회의 키맨 40~50명이 목사님과 함께 식사교제를 가졌다. 목사님과 덕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한 평신도 지도자가 목사님께 “하실 말씀 없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때 박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여러분 제가 오 목사님을 아는데, 오 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섬길 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특별히 좋은 일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예언적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나도 그 말씀을 내 것으로 여겼다. 박 목사님은 그 말씀을 내게만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박 목사님이 65세 정도 되셨으니, 아마도 그 연세가 되실 때까지 주변 사람에게도 더러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교회 키맨들은 목사님의 격려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박 목사님의 격려 말씀이 중요했던 이유는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있어 리더십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교회가 불같이 자랐다. 성경 말씀 위에서 누군가가 영적 연륜을 갖고 하는 축복의 말을 믿음으로 받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개인과 교회에 부흥이 일어난다. 영적인 시너지의 선순환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때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을 신뢰해야 하고, 듣는 사람도 믿음으로 축복의 말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같은 말, 같은 찬송, 같은 기도를 해도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기름부으심의 축적, 쌓아짐에 그 열쇠가 있다. 

내가 후배 목회자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있다. “말하는 사람부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말하라. 그래야 성도들이 믿고 따른다. 이것은 설교만이 아니라, 강단에서 발화(發話)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찬송 한 장을 부르더라도 기름부음을 소원하며 전심으로 부르라.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을 부르고 강단에 서라. 그것이 내 것으로 고백되고 체화되며 믿어지는 차원과 그냥 정해진 순서에 따라 부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목회의 경험적인 진리다. 찬송가 458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는 적어도 1,000번 이상을 불렀을 것이다. 대학부 시절 7년 이상 용산 철도 병원 사역을 할 때 매주 불렀던 찬송이다. 찬송을 부른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송 속에 축적된 기름부으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럴 때 찬송가 한 장을 부르더라도 사람들의 영혼에 거룩한 공진이 일어나고, 가슴으로 은혜가 흐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것이다. 

냉소주의가 교회 내에도 만연해 있다. 사회의 무신론적 사상과 반기독교적인 문화의 영향이 교회 내로 스며들고, 이제는 강단까지 냉기가 차오르고 있다. 

강단이 사는 길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쌓여야 한다. 이것이 강단에서 축적되면 어느 순간 영적인 임계점을 돌파하고, 기름부으심을 통한 보혈의 강수로 축복의 잔(고전 10:16)이 넘치는 그날이 반드시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