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2004년 04월

한국 교회를 거룩으로 새롭게 하소서!

발행인칼럼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왜 다시금 ‘거룩’인가? ‘교리’라는 단어와 함께 전 세기의 유물로 간주되었던 거룩이라는 단어가 21세기에 다시 주제로 떠오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중세 기독교 고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곰팡내 나는 ‘거룩’이라는 단어는 세련되고, 화려하며 감성을 자극하는 광속의 시대에 부적절한 단어처럼 보인다. 게리 콜린스는 “거룩은 감옥이며, 강제적이며 불편하며 가장자리가 헤진 것이다”라는 말로 거룩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불편한 옷이며, 끔찍한 존재로 여겨지는지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이 병든 시대의 탈출구로 여겨지는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에서는 사라진 용어이다. 인간의 정신을 다루고 그 치료책을 제시하는 심리학의 어느 곳을 보아도 환자들을 치료하는 키워드로서의 거룩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과 섬김이 강조되고, 믿음과 인내가 그 뒤를 따라가지만, 거룩이라는 단어는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거룩이라는 단어는 경건의 모양으로 조롱되고, 한 걸음 나아가 위선이라는 말과도 부분적이나마 동일시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룩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아니다. 예수님의 판단이 우리의 잣대이다. 두아디라교회는 기독교의 아름다운 미덕인 사랑과 믿음과 인내로 활짝 핀 꽃동산과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교회를 심히 책망하였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세속문화에 오염되어 거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계 2:20). 성경은 교회가 아무리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거룩’으로 필터링 되지 못하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온갖 미덕으로 가득 찼지만 거룩을 상실한 두아디라교회를 “화려한 꽃동산 속에 독초가 방치된 교회였고, 건강한 몸에 악성종양을 키우고 있었던 교회”라고 표현했다.

 

21세기의 교회에 거룩이란 무엇인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덧칠되어 왔다. 어떤 면에서는 무수한 덧칠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정수가 결정적으로 훼손되지 않고 내려왔다는 것은 기적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의 덧칠로 인해 어떤 부분들은 처음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것도 있고, 변질된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칠된 기독교에 지존하신 하나님의 거룩이 비춰질 때, 덕지덕지 덧붙여진 변형되고 변질된 아류들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거룩으로 필터링하지 못하면, 명품으로 코디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악(惡)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멋진 외투를 입고, 감각 있는 넥타이를 매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음 지으며 친절하게 인사하는 악(惡)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고 존경할 만한 지성의 보석으로 치장하였다고 해도, 거룩이라는 엑스레이를 관통하는 순간 그 본래의 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거룩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해묵은 죄가 단 하루만에 제거되고, 아침에 일어나면 거룩한 자로 거듭나기를 꿈꾼다. 그러나 거룩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서 쌓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몸에 거룩의 훈련을 쌓는 것은 제자훈련의 필수적인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거룩이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면 제자훈련은 죄가 우리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잡초를 뽑아내는 김매기와 같다. 그러므로 거룩과 제자훈련은 함께 가야만 한다.
죄가 교회에 스며들고 있다. 거룩이 사라진 곳에 제일 먼저 자리 잡는 것은 위선이다. 그 다음에 따르는 것은 은밀한 더러움이다. 세속성의 누룩은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서서히 한국 교회에 퍼져 지금은 세상 사람들의 어두운 눈에도 훤히 드러나고 있다. 그들에게 비친 교회의 모습은 맘몬에 짓눌리고, 칠계로 파산하는 모습이다. 교회가 영적 조산소가 아니라 영적 묘지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더 사랑하고 더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는 거룩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고 거룩을 붙잡은 교회만이 생명의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을 수가 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고 영적 각성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세속의 신발을 벗고 거룩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뿌리를 둔 거룩이며,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거룩이다. 거룩의 뿌리는 규범이나 원칙이나 기준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열정이다.

 

한국 교회가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는 기도를 드릴 때마다 몇 달 전부터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는 생각이 있다. 2004년 한국 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그것이다. 나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2004년 4월 11일 부활절 연합예배가 우리 한국 교회를 거룩으로 새롭게 하는 영적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교파와 교단을 뛰어넘어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새롭게 거룩한 부흥으로 일어서는 제2의 부흥 원년이 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부활절 연합예배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각 교회의 벽을 뚫고 나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고 이 나라 이 민족을 회복시키기를 간절히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