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김명호 목사_국제제자훈련원 대표
여름을 마감하면서 국내 각 지역에서 팀장으로 섬겨 오던 제자훈련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정말 오랜만에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제자 삼는 사역을 중심으로 목회를 해오면서 누렸던 사역의 기쁨과 감사,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지냈던 마음 아픈 경험들을 함께 나누면서 보낸 2박 3일은 너무나 짧았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던 주제는 제자훈련과 다양한 소그룹 사역의 접목이었다. 셀이나 가정교회, G12 혹은 D12와 같은 다양한 소그룹 사역을 제자훈련과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최근에는 “제자훈련을 넘어서” 셀 교회로 가겠다고 선포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왜 제자훈련을 넘어야 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제자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경험했던 어려움을 마치 제자훈련에 어떤 한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직도 제자훈련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다.
제자훈련을 손쉽게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담임목회자가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데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기보다는, 유명 강사를 초청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훈련을 시켜주는 세미나에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경우도 보게 된다. 역시 제자훈련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목회자는 제자훈련이 셀과 가정교회, G12와 같은 사역단체를 후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모습은 적과의 동침이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따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러한 사역들이 제자훈련의 적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제자훈련과 셀, 제자훈련과 가정교회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비교를 하려면 다락방과 셀, 가정교회, 구역을 비교해야 격이 맞다. 제자훈련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이고, 이들이 섬길 수 있는 사역의 장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락방, 셀, 가정교회, 속회, 구역 등의 다양한 형태로 접목될 수 있다.
얼마 전 제자훈련에 셀 사역을 접목하려고 고민하는 목회자를 만났다. 그분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탄탄하게 목회의 기틀을 잡아놓은 분이다. 그런데 소그룹 사역을 꼼꼼히 살펴보니 마음에 차지 않는 구석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름답게 사역하는 소그룹 리더도 있지만, 교회 전체의 소그룹이 좀 더 활성화되고 전도 지향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을까 고민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 어설프게 다른 이론을 접목하다가는 본질 자체를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제자훈련의 장점을 놓치고, 퇴행을 경험할 수도 있다. 훈련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다른 성도들을 돌볼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를 세워놓고는 정작 그들의 역할을 소그룹에서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삶을 나누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며 섬기는 일로만 제한한다면 양복에 상투를 튼 격이다.
사실 소그룹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셀이나 가정교회라고 부르는 교회 가운데에도 말씀을 통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소그룹이 많기 때문이다.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그 소그룹 안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고 말씀으로 인격과 삶이 변화되는 균형잡힌 역사가 일어나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제자훈련을 통해 준비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최대한 활성화함으로,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전인적(holistic) 소그룹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전도 지향적인 열린 소그룹의 장점을 접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좋은 모델들이 나와서 함께 서로에게 도전이 되고, 각각의 교회의 형편에 적합한 다양한 소그룹 사역의 모델로 인해 제자훈련의 꽃이 피기를 바란다. 제자훈련을 넘어갈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으로 인해 열매 맺는 아름다운 소그룹 사역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