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야기

2015년 10월

다일교회 * 밥퍼 교회에도 제자훈련의 꽃이 피고 있다

현장이야기 박희원 목사

김유현 목사는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장신대학교 청목과정을 수료했다. 부산 남성교회 전도사와 부산중앙교회 부교역자로 섬기다가 다일공동체에서 밥퍼나눔운동 본부장과 다일복지재단 사무국장으로 섬겼다. 2010년 1월부터 현재까지 다일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1988년 겨울부터 청량리역에 홀연히 나타나 노숙자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며 거리에서 성탄예배를 드리던 최일도 목사(당시 전도사). 이듬해 1989년 청량리 588-12번지 허름한 창고 건물에서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를 포함한 5명으로 다일공동체가 시작됐다. 최 목사가 그때까지 계속해 왔던 노숙자 무료급식 사역과 공부방 사역을 시작으로, 다일공동체는 수많은 동역자들을 얻었고, 20년 동안 조금씩 사역의 영역을 넓혀 다일복지재단, 다일천사병원, 밥퍼나눔운동본부, 다일자연치유센터, 다일평화의집, 다일교회 등을 세웠다. ‘밥퍼’라는 말로 알려진 최일도 목사와 다일공동체 사역은 한국 교회에 잔잔한 감동과 강력한 도전을 가져다줬고, 지금까지도 그 사역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가 개척해 지금은 원로목사로 있는 다일교회는 현재 제자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밥퍼’와 ‘제자훈련’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편협한 선입견에 불과하다. 다일교회의 사회봉사 사역을 계승할 뿐 아니라, 거기에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접목해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있는 김유현 목사와 이명숙 사모를 만났다.

 

제자훈련 목회의 기초를 다졌던 시절
김유현 목사는 부산에서 태어나 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대학 졸업 후 IVF 간사로 섬기면서 귀납적 성경연구와 강해설교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이후 총신대 신대원에서 귀납적 성경연구 동아리인 ‘아나톨레’에서 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며 성경을 능숙하게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는 훈련을 받았다. 
그런 그가 전통 교회에 접목된 제자훈련을 본격적으로 경험한 것은 부목사로 사역했던 시절이다. 모교회였던 부산 남성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다 부산중앙교회로 옮겨 부교역자로 10년간 사역했는데, 그때 3년 동안 제자훈련을 진행했다. 김 목사는 그때 제자훈련의 유익에 대해 확신하게 됐다.
“부산중앙교회에 있을 때에 최현범 담임목사님이 제자훈련에 대한 원칙과 철학이 매우 분명하셨어요. 교회가 커져서 부교역자에게도 제자훈련을 맡기셨는데,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맡아 해 보니까, 한마디로 ‘참 좋구나’ 싶었지요. 교회의 여러 다른 사역들도 맡아 사역했지만, 그때 제자훈련이 얼마나 유익한 사역인지 확신하게 됐습니다.”

 

강권적인 부르심
김 목사는 부산중앙교회에 있으면서 IVF 학생들과 함께 다일공동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국내 선교여행을 하면서 다일공동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부산중앙교회 고등부 사역을 할 때에는 교회 학생들과 함께 2년간 다일공동체에서 봉사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 다일공동체와 같은 사역을 꿈꾼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평범한 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봉사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2006년 부산중앙교회에서 최일도 목사를 초빙해 집회를 가진 것이 김 목사의 목회 여정을 바꾼 계기가 됐다. 수석부목사로서 최일도 목사의 수행을 맡은 김 목사는 인사를 하면서 최 목사에게 예전에 다일공동체에서 몇 번 봉사활동을 했다고 말했다가 그것이 화근(?)이 됐다. 최일도 목사는 대뜸 “김유현 목사님 같은 분이 우리 다일공동체에 와서 일을 해야 하는데…”라고 말했고, 인사말이라고 생각한 김 목사는 “네 좋죠”라고 대답했다. 최 목사는 그 말에 다일공동체에 꼭 오라고 하면서 영성수련회에 참석하라고 권했고, 김 목사는 크게 유념하지 않고 “예”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최일도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가 끝나고 한 달쯤 지나 김 목사는 앞으로의 목회 진로를 위해 새벽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만 9년 째 부교역자로 사역하고 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디든지 제게 오라는 데가 있으면 묻지 않고, 강원도 산골짜기라도 순종하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 바로 그날 오후에 최일도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왜 온다고 하고서는 안 오냐”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그 전화 내용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석부목사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에 바빠 참석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최 목사는 본격적으로 다일공동체 와서 같이 일하자고 말했다. 이에 김 목사는 “저는 일반목회를 생각했지 특수목회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에 최 목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왜 이 일이 특수목회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먹이시고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르는 게 일반목회 아닙니까? 좋은 건물에서 냉난방 시설 잘 된 곳에서 하는 목회가 특수목회지, 어째서 다일공동체 사역이 특수목회입니까?”
최 목사는 한 번도 다일공동체 같은 사역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김유현 목사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나도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다 준비해 둔 상태에서 청량리로 부름 받아 20년 째 사역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도 생각해 보십시오. 보름 뒤에 대구에서 만나 이야기해 봅시다.”
전화를 끊은 김 목사의 입에서 “하나님, 저는 교회라고 했지 ‘밥퍼’를 말한 게 아닙니다. 교회라면 산골짜기라도 가겠다고 했지 ‘밥퍼’는 아닙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이명숙 사모 역시 “목사는 목회를 해야 한다”라며 반대했다. 이 사모는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오래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군복지재단에서도 사역을 했기 때문에 복지사역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유현 목사 부부가 다일공동체로 옮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름 동안 김 목사 부부로 하여금 많은 기도를 하게 하시고, 큰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셨다. “보름 동안 기도하며 아내와 함께 최일도 목사님이 쓰신 책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도 읽었습니다. 안 읽었어야 했는데(웃음). 그제서야 최일도 목사님이 유학을 포기하고, 편하고 좋은 목회지를 두고 청량리로 들어갈 때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최 목사님은 성공이나 인정을 기대하고 청량리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죽기 위해 들어가셨더군요. 그곳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자리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셨음을 알게 됐습니다.”
김 목사는 새벽에 기도하며 가졌던 ‘산골짜기 교회라도 가겠다’라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산골짜기 성도들을 위해 살다가 죽을 마음을 먹었다면, 청량리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죽을 마음을 못 가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 목사 부부는 마음을 정리했고, 대구에서 최일도 목사를 만나 다일공동체에서 사역하기로 약속한 후 부산중앙교회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이듬해 2007년부터 다일공동체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최일도 목사는 김유현 목사에게 일반목회와 특수목회란 인간이 나눈 것일 뿐, 주님 안에서 모두 같은 사역이요, 같은 목회라고 가르쳤다. 김유현 목사의 그 이후 삶은 ‘일반목회’와 ‘특수목회’는 다른 것이 아니며, 목사가 할 일과 목사가 하지 않을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봉사 사역’과 ‘제자훈련 사역’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목사가 하는 일 빼고 전부 다 하던 시절
이명숙 사모는 부산중앙교회에서 다일공동체로 옮길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산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교를 간다고 생각하고 갖고 있던 것을 다 정리했죠.”
김 목사 가족은 다일공동체에서 사역하기 위해 1년간 다일공동체 DTS 훈련을 받았다. 그 1년 중 처음 6개월은 가평 다일공동체 자연치유센터(다일공동체훈련원)에서 공동체생활을 했다. 첫날부터 삽과 호미를 들고 농사, 공사, 청소, 주방일, 쓰레기 처리 등의 모든 노동을 경험했다. 
그때 부산중앙교회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후배 목사가 “형님, 거기서 뭐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김 목사는 “목사가 하는 일 빼고 전부 다 한다”라고 대답했단다. 그러나 김 목사가 경험한 그 노동이야말로 ‘목회’ 즉 ‘목사가 할 일’이 아니었을까. 노동을 경험하며 6개월을 보낸 후 김 목사 혼자서 청량리로 이동해 따로 생활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자연치유센터로 돌아와 예배 인도를 했다.
김 목사 부부는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다니는 시골에서, 한 학년에 8명밖에 없는 초등학교와 한 학년에 두 반밖에 없는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잘 적응해 준 자녀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사실 김 목사가 가진 인상이나, IVF 간사, 부산중앙교회 수석부목사라는 이력만 생각하면 삽과 호미, 망치와 톱을 들고 노동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일반목회와 특수목회를 구분 짓는 일이나, 목사가 할 일과 목사가 안 할 일의 구분을 무너뜨리시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곧 다시 그를 소위 일반목회로 부르셨다. 

 

다시 목사가 할 일을 하기 시작하다
김 목사는 2007년부터 청량리 밥퍼나눔운동 본부장과 다일복지재단 사무국장을 맡아 사역하기 시작했다. 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사역했다.
“다일공동체에서 2년 정도 사역하던 중에 부산에서 은사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부산에 담임목사 자리가 하나 났는데, 거기 지원해 보라는 거였죠. 교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에 예의상 일주일만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하고, 일주일 후 전화드려 여기 사역이 너무 중요하고 바쁘기 때문에 호의는 감사하지만 못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물론 다일공동체 내에서도 목회자로서의 사역이 없지는 않았다. 다일교회 사역을 섬겨야 했기 때문이다. 청량리의 한 허름한 창고 건물에서 시작한 다일교회는 이후 대광고등학교 강당으로 옮겨 예배드리다 약속한 10년이 지나, 2004년부터는 남양주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드리고 있었다. 최일도 목사는 다일교회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고, 외부 사역도 많이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다일공동체에 소속된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남양주에 있는 다일교회 예배를 인도했다.
사실 청량리의 다일공동체 사역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주일에 남양주 다일교회까지 가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김 목사는 그 사역이 피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역시 목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던 김 목사에게 최일도 목사가 다일교회를 맡아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최일도 목사님이 갑자기 전화하셔서는 ‘다일교회 맡아 볼래?’ 하시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는 펄쩍 뛰었죠. 절대 안 간다고 했어요. 사실 고향인 부산에서 담임목사로 오라고 했는데도 안 가지 않았습니까. 목회는 포기한다고 마음먹었는데, 최 목사님이 다시 목회를 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죠.”
사실 최일도 목사가 처음부터 김유현 목사를 다일교회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유현 목사 이전에 다일교회를 맡을 목사가 내정돼 있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맡을 수 없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다일교회 성도들과 당회원들이 김유현 목사가 담임목사로 와 주면 좋겠다고 최일도 목사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최 목사도 처음에는 김 목사는 밥퍼나눔운동 본부장과 다일복지재단 사무국장까지 맡고 있어 곤란하다는 뜻을 당회원들에게 비췄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교회 분위기는 가능한 다일공동체 목사들 중에서 담임목사를 모시기 원했고, 그중에서도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은혜를 끼쳤던 김 목사를 원했다. 그래서 최일도 목사는 김 목사에게 다일교회 후임을 맡아 줄 것을 직간접적으로 요청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김 목사는 교단 때문에라도 다일교회를 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일교회는 통합 교단에 속해 있는데, 자신은 합동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일교회의 당회원들이나 성도들은 교단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결국 김 목사는 장신대에서 청목 과정을 이수하고 통합 교단으로 옮기게 된다. “제가 학부는 고신대학교를 나오고, 신대원은 총신대학교를 나왔는데, 지금은 장신대학교 청목 과정을 거쳐서 통합측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교단 그랜드슬램을 이뤘다고들 하더군요.”
이렇게 김 목사는 귀납적 성경연구와 강해설교 훈련을 기반으로, 삽과 호미를 들고 노동을 하는 다일공동체 DTS를 받았고, 제자훈련 목회를 하는 교회에서 수석부목사로 사역하다가 밥퍼나눔운동과 다일복지재단 사역을 했다. 그러다 다시 일반목회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다일교회는 예배당을 대광고등학교에서 남양주로 옮기며 지역교회화 되는 과정에서 교인들의 변화도 있었고, 최 목사가 은퇴를 선언한 후 한 명의 목사가 강단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됐기 때문에 상당한 혼란과 갈등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처음 다일공동체로 올 때 죽기를 각오했던 것을 되새기며, 다일교회 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단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김 목사뿐 아니라 다일교회의 당회원들과 최일도 목사의 역할도 상당히 컸다. 당회원들이 외부에서 유명하고 검증된 목사를 청빙하려 하지 않고 다일공동체 목사 중에서 담임목사를 택하려 했고, 최일도 목사가 당회원들의 의견을 존중해 김 목사 청빙에 동의했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는 다일교회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리더십 교체기를 순조롭게 넘길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평가된다.
김 목사 부부는 최일도 목사가 자신의 젊음을 바쳐 일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을 뿐 아니라, 원로목사가 된 후 단 한 번도 김유현 목사의 목회에 대해 간섭하거나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며 큰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제자훈련을 시작하다
2010년 1월 31일, 김유현 목사가 다일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됐고, 2월 7일에는 최일도 목사가 다일교회 담임목사 자리에서 은퇴했다. 김 목사는 모든 성도와 최 목사의 아낌없는 응원을 받아 다일교회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리더십이 교체되는 당시에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출석이 뜸했던 성도들이 돌아오기도 하고, 크고 작은 상처들이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다일교회에 부임한 김 목사는 조금씩 제자훈련 사역을 위한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 일반목회와 특수목회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귀납적 성경공부’와 ‘밥퍼’가 함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밥퍼’에게는 ‘귀납적 성경공부’가 필요했다.
물론 김 목사가 처음부터 제자훈련을 한 것은 아니다. 김 목사가 부임 초창기에 선택한 것은 강해설교와 새벽기도 운동이었다. 다일교회는 아무래도 사회봉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제자훈련을 당장 접목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씩 말씀의 맛을 들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9월에 마침내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제자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기 제자반은 구역장들을 중심으로 모아서 시작했는데, 그것도 강권해 모집했다. 그런데 그 결과와 반응이 너무 좋았다. 개척 당시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하지 않은 교회의 경우 당회원들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1기 제자반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하면, 이후 제자훈련을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워진다. 김 목사는 9명의 구역장들로 이뤄진 1기 제자반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후 단계가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2기 제자반을 시작할 때는 시무장로들과 은퇴장로들, 그리고 안수집사 몇 명이 함께 모인 남자반까지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2기에는 남자반과 여자반 두 반이 진행됐고, 역시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되자 3기부터는 서로 제자훈련을 받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2기까지는 제자훈련을 받으라고 권유해야 했지만, 3기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3기는 기적의 제자반이었어요. 도저히 제자훈련을 받을 만한 여건이 안 될 사람들이었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다 퇴근하면 쓰러져 자기 바쁜 분들도 있었어요. 남편이 큰 병에 걸려 간호를 해야 하는 분, 암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분들도 훈련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은혜와 새 힘을 얻은 겁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도저히 제자훈련을 받을 만한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이 훈련을 수료하고 간증했지요.”
이를 통해 제자훈련은 직장이나 시간이 핑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 교인이 알게 됐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서로 제자훈련을 받으라고 권면했다. 제자훈련 수료식 간증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쳐 많은 이가 제자반에 지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원래 주일 남자반 하나, 평일 여자반 하나만 있던 것을 주일 오후에 하는 여자 직장인반을 하나 더 개설하게 됐다. 지원자가 너무 많아 두 반으로 나눠 부목사와 이명숙 사모가 한 반씩 인도하게 됐다. 제자반만 네 반이 개설된 것이다.
너무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 목사도 어느 정도 이를 의식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교회가 제자훈련으로 기틀을 잡아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큰 교회가 아니기에 “아마 이후에는 제자훈련 지원자가 줄어들겠죠. 그러나 그것은 그리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후 사역훈련 등을 시작할 것이고, 이를 통해 교회 전체가 훈련받는 분위기로 변화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철저한 제자훈련과 ‘밥퍼’의 정신 계승
그렇다면 다일교회 제자훈련은 어떤 특성이 있을까? 다른 제자훈련을 하는 CAL-NET 교회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삽과 호미로 제자훈련을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실상은 CAL-NET 교회들과 다르지 않다. 김 목사는 부산중앙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최현범 목사에게 ‘원칙적으로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제자훈련 오리엔테이션 때 ‘국제제자훈련원에서 당부하는 준수 사항’을 제시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수료할 수 없음을 확실히 하고 시작한다. “제자훈련의 강도가 낮아지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냥 성경공부로 끝나게 되죠. 그래서 기준대로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신학을 공부한 사역자라 하더라도 아무나 제자훈련을 인도할 수 없기에 반드시 제자훈련 체험학교를 이수해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김 목사는 “많은 분들이 CAL세미나를 들으시는데, 제자훈련에 도전을 받았다고 하면서 체험학교를 이수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체험학교는 제자훈련 목회를 하려면 반드시 이수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제자훈련을 위해서는 목회자가 먼저 잘 준비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제자훈련 토양을 다지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IVF 간사와 아나톨레 교육부장 출신답게, 큐티와 귀납적 성경연구에 대해 상당한 식견과 관심을 갖고 전 교인에게 큐티를 하도록 홍보하고 있다. 제자훈련생들에게 큐티를 강조하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원래 귀납적 성경연구는 관찰, 해석, 적용입니다. 그런데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교재에는 ‘느낀 점’이 추가돼 있죠. 그런데 해 보니까 이 느낀 점을 쓰는 게 너무나 중요하더군요. 옥한흠 목사님이 정말 성경 묵상 체계를 잘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을 마친 사람들이 계속 큐티를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내년부터는 교회적으로 <날마다 솟는 샘물> 큐티지를 사용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올해부터는 성경 강좌를 개설했다. 김 목사는 매주 철저한 강해설교를 이어가고 있지만, 설교에만 의존해서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출 수 없고,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4년 커리큘럼을 가진 성경 강좌를 개설해 부교역자들이 한 강좌씩 맡아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다 보니 이명숙 사모가 “이제는 봉사를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하는 교회라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다른 제자훈련 교회와 다른 점이라면 봄에 시작하지 않고 가을(9월)에 시작해 여름에 끝난다는 점과, 제자훈련 수료자들이 수료여행을 떠난다는 점 정도다. “실은 1기를 가을에 시작했더니 계속해서 가을에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을에 시작해 여름에 끝나니까 직장을 가진 분들도 휴가가 있어 훈련을 수료한 사람들끼리 수료여행을 가기에도 좋습니다.”
그렇다고 다일교회가 ‘밥퍼’로 대변되는 사회봉사의 정신을 버리거나 약화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자훈련과 사회봉사활동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킨다. 사회봉사 사역에 초점을 맞추던 성도는 말씀으로 다져지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성도들은 다일교회의 능동적인 봉사활동에 도전받는다.
“1기 제자반을 수료하신 권사님 한 분이 청량리 밥퍼에 주방장으로 파송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 수료식을 하는 날에 권사님 파송식까지 함께했습니다.”
김 목사는 지금 제자훈련으로 다일교회의 전통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있다. 다일교회에 새로 유입된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이전의 봉사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 ‘1% 선한이웃 운동’을 시작했는데, 성도들로 하여금 12개의 봉사처 중 한 군데 이상에서 봉사하게 하고 있다.
다일교회 예배당은 모두 컨테이너 조립식 건물이나 비닐하우스 등으로 이뤄져 있다. ‘교회 재정의 25~51%를 지역사회를 위해 나누며 섬기는 교회’가 다일교회의 정체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재정을 건물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한강변 잡풀만 자라던 벌판에 조립식 건물로 세운 교회지만 다일교회 예배당은 무척 아름답다. 또한, 오래된 음식점을 인수해 식당으로 쓰고 있다. 그 음식점이 원래 농지였던 땅을 불법으로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법을 준수해 텃밭으로 만들었다. 교인들은 그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는 먹거리들을 함께 나눈다.
지역사회 구제사역에 집중하는 다일교회의 정신은 지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요즘에는 청소년 밥퍼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출해서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 애들이 먹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2차 범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경계심을 가지고 가까이오지 않던 아이들이 지금은 스스럼없이 와서 함께 먹고 한 시간 이상 놀다 갑니다. 그 아이들에게 누군가는 친구가 돼 주어야 하거든요. 아이들이 구석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놀고 있으면 결국 그 장소는 어두운 곳, 우범지대가 돼 버려요. 거기에 저희가 밥차를 끌고 가니까 아이들이 밝아졌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다일교회는 정기적으로 담임목사 신임 투표를 한다. 3분의 2 이상의 신임을 얻어야만 담임이 유임될 수 있다. 지난 8월 30일, 김유현 목사에 대한 신임 투표가 시행됐고,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김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계속 맡게 됐다. 김 목사는 다일교회 사역의 한 기간을 마친 소감을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했다.
“최일도 목사님 같은 귀한 목회자의 후임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만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컸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가 있었고, 최 목사님의 격려와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한다’라는 다일의 정신을 제자훈련으로 잘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다일교회 담임목사가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어려서부터 겪었던 모든 일과 다일공동체에서 훈련받고 사역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 목사는 다일교회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도해 오셨던 것처럼, 이후에도 신실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믿고 따를 거라고 말한다. 실로 김유현 목사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는 김 목사가 예상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았지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신실한 종이었던 그에게 일반목회와 특수목회의 구분이 없음을 일깨우시고, 성경묵상과 함께 삽과 호미를 들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셨다. ‘밥퍼’의 영성과 ‘제자훈련’의 영성을 효과적으로 융합하고 있는 다일교회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다일교회에서 훈련된 주님의 종들이 지역사회와 한국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