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제자훈련 이강일 목사_ 청주중앙교회
오랜 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한 지 2년 7개월이 되었다. 20여 년 만에 돌아온 한국 목회는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체험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와 상황을 통해 그때마다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면서 한국 목회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예장 합동교단 총회장을 배출한 73년 된 전통 교회에 부임해 목회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일부의 지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목회 환경도 아니었다. 당회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사역에 큰 힘을 얻고 있다. 73년 된 전통 교회의 당회가 담임목사 부임 1년 만에 당회실을 없애고, 개인 기도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을 배려해 줄 만큼 협조적이다. 성도들도 여러 가지 변화의 과정에 묵묵히 따라와 줘서 참으로 고맙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여러 고민이 존재한다.
성장에 대한 조급함과 싸우다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 왕은 블레셋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서 백성들과 모였다. 그러나 제사를 집례할 사무엘은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졌다(삼상 13:8). 이때 사무엘이 사울의 잘못을 지적하자 사울이 대답한 것이 내 마음 같았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삼상 13:11).
목회는 이론도 중요하지만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선배 목회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부임한 지 3년 안에 부흥하지 않으면 부흥하기가 힘들다.” ‘부흥’이 무엇인가?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내적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숫자적 부흥에 목숨을 걸고 있지 않는가? 물론 지난 2년 7개월 동안 눈에 보이는 숫자적 증가도 있었다.
그러나 과연 얼마큼의 증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증가인가? 부교역자 때 많이 들었던 조언이다.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잠언 14:28). 교인 수가 많은 것이 목회의 전부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는 성도의 숫자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존재다.
일부 목회자들이 여러 이유로 교회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른 이유이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교인 수가 증가하지 못하고 침체해 결국, 교회가 분쟁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매주 출석 통계를 보기가 어떤 때는 두렵다. 분명 이것만이 목회의 전부가 아닐 텐데, 출석 숫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안쓰럽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가?
73년 된 전통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많은 지원자가 있어 작년에는 7개 제자반을 혼자 진행할 만큼 열심히 사역했다. 제자반 이후 사역반은 보통 한 반을 운영하는데, 첫 시간에 수업을 진행해보니 깊은 훈련이 부족할 것 같아 사역반을 4개 반으로 분리해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조급함에서 나오는 현상일 수도 있다.
빨리 숫자를 증가시켜서 안정을 시키고 싶은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지 않았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물론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에 순종하면 된다’라는 이론은 잘 알고 있다.
1980년에 신학을 했으니 이론과 목회의 기본은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목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도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이 일하시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급함을 내려놓고자 매일 나와 싸우고 있다.
스스로의 이중성과 싸우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하고 목양하며 사역한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니 누가 봐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2년 7개월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려왔다. 부임 이후 사역을 하다가 갈비뼈와 발이 골절됐지만, 일찍 퇴원해서 중단 없는 사역을 진행했다. 누구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해 왔는가?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만으로 목회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내 속에 있는 이중성을 보면서 스스로 놀랄 때가 참 많다. 설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이 괴로울 때도 있고 남에게 보여주기식의 목회는 하지 않는지 자문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몰라도, 나는 나의 이중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의 목회 고민은 외부 환경이 아니다. 내 속에 있는 자만심으로 인한 조급함과 이중성이다. 성도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은 잠시다. 나의 목회의 고민은 내 속에 있는 나와의 싸움이다. 알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싸움을 지금 이 순간도 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