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설교자 우은진 편집장
손인웅 목사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와 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멕코믹신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명예회장, 한국기독교봉사단 이사장,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장신대학교 장학재단 이사장, 한국자원봉사협의회 공동대표, 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덕수교회 원로목사로 섬기고 있다.
일 시 2017년 3월 11일(토)
장 소 덕수교회 일관정
인 도 김지혁 목사(사랑의교회)
정 리 우은진 편집장(월간 <디사이플>)
<디사이플>은 2017년 ‘설교와 설교자’ 코너를 통해 한국 교회의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를 비롯해 자신만의 설교 특징을 가진 목회자를 매월 만나 그에게 설교란 무엇이며, 설교 준비 과정, 설교의 영향력 등에 대한 담론을 듣고자 한다. 그 네 번째 시간으로 한국 교회 갱신과 일치 운동,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한 봉사 활동,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자로 잘 알려진 덕수교회 손인웅 원로목사를 사랑의교회 김지혁 목사가 만나 봤다. <편집자 주>
김지혁 목사 목사님은 평소 “설교의 문제는 설교자의 문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설교자로서 평생 사역하시면서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것과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각각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손인웅 목사 목회자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이 바로 설교 사역이다. 설교 사역은 제일 힘든 사역이기도 하다. 요즘 많은 설교자가 그렇듯 인터넷 등에서 정보를 모아 편집해 설교하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설교는 설교하는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을 전공하다가 극적인 소명을 받아 신학으로 바꿨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 국문과 출신인데, 문학을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시 한 편을 쓰려고 해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데, 막상 신학을 공부하니 신학은 문학보다 더 어려웠다. 특히 설교 한 편을 작성하는 것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더군다나 설교는 일주일에 여러 번 해야 하는 등 빈도수도 많아 부담감이 매우 컸다. 또 설교는 말에 대한 책임감도 많이 요구된다. 설교자의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힘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한다. 나는 43년 동안 현직에서 목회를 했다. 거기에 원로목사로서의 세월까지 합치면 50년간 목회를 한 셈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깨달은 목회 철학은 내 사상과 삶의 모든 철학적 배경이 사역에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선포한 설교 내용을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했기에 오랫동안 설교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설교자의 설교는 설교 따로, 설교자의 삶 따로의 소위 ‘쇼’가 돼서는 안 된다.
설교자의 삶이 곧 설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게 내 목표이자 후배 설교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바다. 나는 은퇴할 때 43년간 덕수교회 강단에서 선포한 예배, 선교, 교육, 봉사, 친교 등 다섯 가지 주제와 관련한 설교를 모아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세우는 오색목회설교』라는 책을 출간했다. 나는 목회 커리큘럼을 갖고 목회하는 것이 균형 있는 목회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균형 성장, 그게 핵심이다. 거기에 기준을 맞추고 서로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설교를 진행해야 한다. 교회 전체가 온전한 교회가 되도록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그 핵심이 바로 설교다. 설교도 한 주제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정해 설교했다. 덕수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화목한 교회’였다. 어떤 사안이든지 만장일치를 이뤄 진행했다. 그래야 교회가 아름다워지고 온전해지며, 교인들이 행복해진다. 화목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내 몸에 배어 있다. 그것이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전달되고, 교인들은 예배, 선교, 교육, 봉사, 친교 등 다섯 가지 주제를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려는 성도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것이다.
김지혁 목사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던 세대와 지금의 목회자들이 설교하는 시대를 비교하면 어떤 차이를 느끼시나요?
손인웅 목사 솔직히 우리 세대와 비교하면 너무 쉽게 설교가 나오는 것 같다. 설교자는 한 편의 설교를 위해 고민하고, 몸부림치며 노력해서 설교를 완성해야 한다. 설교가 쉽게 나오면 안 된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과거에 비해 설교 문장도 매끈하고 내용 정리도 잘한다. 한마디로 요즘 젊은 설교자들의 설교는 세련됐다. 그러나 설교는 밤새워 가며 설교자가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과 영적 싸움도 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 말씀을 적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 본문의 텍스트와 배경 내용을 고민하며 설교자 자신의 신앙적 고민이 들어갈 때, 설교는 교인들에게 감동과 변화를 전할 수 있다. 요즘 설교는 내용은 매끈하지만, 고민의 흔적이 약하다. 그렇기에 설교의 무게가 깊지 않고 울림 또한 크지 않다. 설교를 듣고 교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요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보면 삶과 신앙이 불일치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다. 이런 문제가 바로 설교자의 설교 준비의 고민과 영적 싸움이 약화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많이 아쉽다. 물론 목회자의 삶이 과거보다 더 바빠지고 사역도 많아지긴 했다. 고(故) 옥한흠 목사는 설교 한 편을 위해 40시간 동안 진액을 쏟는다고 말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설교 내용을 고민하다 매주 금요일 밤 하루는 꼬박 지새우곤 했다. 그렇게 새벽을 지새우며 씨름한 설교가 완성돼 나오면 마음이 너무 기뻤다. 마치 고3 학생이 전날 시험공부를 하듯이 43년간 현직에 있을 때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설교 원고와 영적 싸움을 벌였다. 문학을 공부할 때 습작을 하면 유치환 선생님과 김춘추 선생께서 많은 영향을 주시곤 했다. ‘오솔리티’(authority)의 ‘오솔’(author)은 ‘작가’, ‘저술’, ‘저작’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권위’라는 말과 연결된다. 작품 하나가 권위를 지니기 위해서는 작가의 해산하는 수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작품이 명작이 되고, 많은 사람을 감화시킨다. 마찬가지로 한 편의 설교가 권위를 갖고 청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설교자 역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만 한다. 설교자는 언제나 누구에게(Whom), 무엇을(What),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품고, 확실한 답을 가지고 성실히 준비해야 한다.
김지혁 목사 목사님께서는 한 교회에서 43년 동안 교육전도사,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담임목사, 원로목사까지 하시며 설교하셨는데, 덕수교회 청중의 삶에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손인웅 목사 현재 덕수교회 선임 장로가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가르친 대학부 학생이었다. 그 또래 대부분을 내가 가르쳤는데, 지금은 대학교 총장, 대형병원 병원장, 한동대학교 총장 출신들이다. 그 사람들이 내게서 고등부와 대학부 때 신앙 지도를 받았고, 그때 받은 신앙의 감동이 지금까지 자신들을 이끌었다는 고백을 하곤 한다. 제자들 중에 훌륭한 사람이 많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나는 평소 말씀과 삶이 괴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삶의 변화가 있어야 신앙이 자라난다. 그러나 신앙이 멈춘 사람도 있다. 집사에서 장로로 직분이 변해도 교회에서 말썽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은 안 자라는데, 직분만 무거워진 것이다. 신앙이 자란 만큼 그 안목으로 교회 봉사도 하고, 섬김의 기쁨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기쁨도 없고 잔소리만 하면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주역이 된다. 신앙이 자라지 않는 성도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성도는 주일에 말씀을 달게 받아먹어야 한다. 설교자가 주일에 선포하는 설교는 교인들의 가슴에 꽂혀 삶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삶과 신앙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교인 중에는 엉터리 교인이 별로 없다. 삶과 신앙이 연결돼야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라게 된다.
김지혁 목사 덕수교회 성도들은 구성원이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부유한 교인과 가난한 교인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있어서 설교하시기에 불편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간격을 어떻게 매우셨는지요?
손인웅 목사 성북동에 위치한 덕수교회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대비가 다른 교회보다 크다. 성북동에 제일 큰 부촌이 있고, 뒷동네에는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달동네가 있다. 교회는 바로 그 중간에 있다. 빈부 차가 큰 사람들끼리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동네가 서울 시내에서 없을 정도다. 솔직히 이 두 계층 간의 갈등이 일어나면 동네가 시끄러울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교회가 중간 지대 역할을 잘 감당했다. 예배당을 깨끗이 치워 놓으면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져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깨고 달아났다. 마치 내 가슴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교회가 지역 사회로부터 돌팔매를 맞아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 해결점을 디아코니아에서 찾았다. 섬기면 문제가 해결된다. 잘사는 사람들에게 먼저 섬기는 사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노인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공부방, 노인잔치 등을 열어 섬기니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 문이 조금씩 열렸다. 섬김이 지속되자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좋아하고, 계층 간에 화목도 이뤄졌다. 반대로 돈 있는 사람들은 섬기는 삶 자체가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줬다. 있는 사람들이 티를 내서 소위 갑질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역 사회의 화평이 이뤄지기까지 교회가 중간 역할을 잘했다. 또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돼야 하고, 섬기는 자가 돼야 함을 자주 강조했다. 그래야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지역에서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있게 된다.
김지혁 목사 설교자의 경건과 자기개발을 위해서는 어떤 관리를 해야 하는지 목사님의 경험담을 듣고 싶습니다.
손인웅 목사 나는 자기 개발을 위해 시간을 내서 뭔가를 배우는 일을 하지는 못했다. 평소 내가 사는 대로, 스스로 믿는 대로 살아왔다. 몇 번의 죽을 위기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삶의 섭리자이심을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항상 코람 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말한다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다. 그런 임재 의식을 갖고 살면 경건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은 내 경건생활의 근간이었고, 믿음생활의 훈련이 됐다.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의롭게 살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과 자신, 자신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기 위해 스스로 애써야 세상과 교회에 평화가 임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굉장히 어려운 말이다. 강단에 서서 제가 주님을 본받는 것같이 여러분도 저를 본받으라고 교인들에게 감히 설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솔직히 나 역시 설교할 때 바울의 이 말씀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과거 옥한흠 목사와 바울의 이 말씀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옥 목사가 “아마 바울도 힘들게 이런 말을 했을 텐데, 우리도 그런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설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바울과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그만큼 자기 훈련이 돼 있어야 하고, 자기 절제와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그게 참 실제로는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라면, 이 말씀을 목표로 잡고 개인의 생활과 목회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 13~14절의 “그리스도를 위해 미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김지혁 목사 목사님께서는 2011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자로도 섬기시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많은 조언도 해 주셨을텐데, 어떻게 하면 선지자적 마음을 갖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목회자가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 듣고 싶습니다.
손인웅 목사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자로 섬기면서 많은 정치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목회자는 정치와는 늘 거리를 둬야 한다. 항상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중용지도를 걸어야 한다. 목회자는 바울의 말씀과 같이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나라의 지도자인데, 지도자가 잘되게 기도하고 조언해야 백성의 삶이 편안해진다. 지금까지 국가조찬기도회를 섬기면서 그렇게 설교하고 기도해 왔다. 내 신조 중 하나가 목회자가 정치참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정치하는 것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치를 하려면 우선 자주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는 정치인처럼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목회자는 위정자가 바로 서도록 신앙을 기준으로 야단도 치고, 때로는 위로도 해 주는 등 자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만약 목회자가 정치를 하려면 목사직을 내려놓고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안 가리게 된다. 그래서 정치와 교회는 밀착되면 안 되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창조적 긴장 관계를 지녀야 한다. 아무리 정치가와 친해도 잘못했을 때는 지적하고, 잘할 때는 격려하며 거리를 둬야 한다. 그래야 실수를 안 한다. 교회와 목회자는 정치에 있어서도 선지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둘 다 감당해야 한다. 격려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한다. 목회자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도 들어야 한다. 세상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그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전할 수 있다. 세상 상황을 모르면 헛발질을 하게 된다.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해 언론의 논평을 볼 수 있는 선지자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또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어디까지 목회자는 조언자로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김지혁 목사 설교 본문은 어떻게 선정하시고, 본문 선정부터 설교문 작성까지의 준비 과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손인웅 목사 나는 주제설교를 할 때와 강해설교를 할 때, 준비과정이 다르다. 강해설교는 시리즈로 성경 본문을 선택한다. 단, 하나의 본문을 갖고 상황에 맞추는 것은 힘들다. 상황에 안 맞는 본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무시하고 본문에만 집중하기에는 시사성이 좀 부족하다. 그럴 때는 설교 본문을 바꾼다. 본문을 상황에 맞게 설정하면 이어서 설교 내용도 풀어진다. 나는 대부분 교회력에 따라 성서 일과에 충실하게 설교한다. 또 구식이라 지금도 손으로 설교 원고를 직접 다 쓴다. 그래야 뭐가 잡힌다. 그 주에 나가는 설교를 그 주 주보에 요약해서 게재한다. 설교 원고가 주보에 나가야 설교 준비가 완전히 끝난다. 그래서 금요일에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그 원고를 가지고 토요일에 다시 깊게 묵상하고 준비해서 주일에 따끈따끈한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올라서면 설교의 완성도와 만족도가 맞아떨어진다. 그 후에는 주보에 나간 설교 요약을 가지고 구역 지도자들이 구역모임에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면 구역원들이 각자 목사님의 어느 설교 대목에서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고 나눈다. 이런 단계는 주일설교를 들은 후 다시 한 번 설교 내용을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한 번의 설교를 100%는 아니겠지만 성도들이 소화가 되도록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씀이 그들의 삶에 뿌리내려 삶의 변화가 조금씩 찾아온다. 솔직히 주일예배에서 한 번 듣고 마는 설교는 몇 주 지나면 설교 제목도 생각이 안 난다. 성도들의 삶이 말씀과 괴리가 없도록 곱씹게 해야 한다.
김지혁 목사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 설교자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설교자는 누구신지요?
손인웅 목사 신학생 때 주일 1부 예배는 고(故) 강원용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경동교회로 갔고, 2부 예배는 김창인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충현교회로 갔다. 그리고 3부 예배는 고(故)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영락교회로 바쁘게 움직였다. 세 분 모두 설교 스타일이 다르고 특징도 강했다. 신학생 때는 설교를 공부하느라 그렇게 세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중 한경직 목사님이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생각한다. 한 목사님은 항상 쉽게 설교를 하신다. 중학교 졸업생 수준에 맞춰 설교하시는데, 항상 청중에게 감동을 전해 주셨다. 한 목사님은 폐결핵도 앓으시며 고생도 많이 하셨고, 생활도 청렴해 사유 재산을 지니지 않으셨다. 그저 돈이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심방 가서 성도가 돈을 주면 방석 밑에 도로 두고 오실 정도였다. 영락교회가 지원하는 모자원, 고아원, 복지관 등은 모두 한경직 목사님이 해 놓으셨다. 자기 자신이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경건하고, 말씀을 청렴하게 실천하셨기에 말씀에 능력이 있으셨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평가받는 템플턴상을 1992년 수상하셨을 때조차 수상의 영광보다는 자신이 과거 신사 참배한 것을 회개하셨던 분이시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이 공개 석상에서, 그것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신사 참배한 것을 회개하시며 “나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을 오히려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후배 목회자들은 이런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또한 내게는 오랜 시간 함께 사역했던 옥한흠 목사의 설교가 인상적이었다. 옥 목사의 설교는 철저히 말씀 중심적이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그분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대설교가라고 지칭하는 사람도 있지만, 옥한흠 목사처럼 삶이 뒷받침되기는 어렵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목회자는 자신이 설교한 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김지혁 목사 한국 교회 목회자 재교육 문제는 사실 굉장히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한국 교회 강단 회복을 위해 목회자들을 재교육하기 위한 대안이 있으신지요?
손인웅 목사 은퇴 후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섬기게 됐는데, 나는 처음부터 목회자들의 재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초대 은준관 총장 역시 목회자 재교육 문제를 발전시켜 신학교를 하자고 제안했다. 설립위원회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모아 대학원이 만들어졌다. 과거 중세 시대 신학교 커리큘럼은 교의학 중심이었다. 거기에서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이 나왔다. 최근에 와서 ‘실천신학’이라는 용어가 나오면서 목회의 실천성이 절실히 대두되기 시작했다. 기존 신학교들의 틀을 깨뜨려야 하는데, 그게 철밥통과 같다. 신학 교육에 과목 하나를 더 넣고 빼는데, 교수들끼리 목을 내놓고 싸운다. 자기 과목만 주장하면 기존 신학교 교육으로는 변화를 주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 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 실천신학을 중심으로 신학교를 세우자라는 기치 아래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교리와 신학 교육은 교단 신학교에서 하고 있으니, 우리는 실천학만 발전시켜 한국 교회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한다. 사실 한국 교회의 변화는 신학교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실천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운동이 일어나면서 목회자 재교육 프로그램이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교육부에도 재교육기관으로 등록돼 있다. 앞으로 한국 교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를 변화시키는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목회자들을 변화시킬 커리큘럼을 만들고, 팀 티칭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한다. 초교파 신학교로서 젊은 교수와 전임 교수들이 팀을 이루고 석좌 교수와 객원 교수가 팀을 이루는 이중 구조로 서로 보완하면서 팀 티칭을 하면, 옛것도 배우고 새것도 배울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중견 목회자들이 중심을 잡아 나가면 한국 교회가 변화되고 갱신될 것이다. 그래서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는 작지만 굉장히 중요한 학교라고 생각한다.
김지혁 목사 목사님께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옥한흠 목사님과 함께 교회 갱신과 일치, 개혁 운동을 활발히 하셨는데, 그러면서 설교 역시 개 교회 설교에서 한국 교회를 향한 설교로 설교의 주제와 폭이 넓어졌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인웅 목사 옥한흠 목사는 1938년생이고 나는 1941년생이다. 옥 목사가 나보다 3살 위였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하면서 옥한흠 목사를 만났는데, 그의 첫인상은 차가웠다. 당시 예장 통합에서는 나와 숭실통일리더십연수원 조성기 목사, 장신대학교 서정운 총장, 예장 합동에서는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와 서현교회 김경원 목사, 총신대학교 박아론 총장, 예장 고신에서는 창원 한빛교회 윤희구 목사와 시온성교회 이성구 목사, 고신대학교 전호진 목사, 기장 교단에서는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 예원교회 김원배 목사 등이 처음으로 초교파적으로 모였다. 그런데 당시 옥한흠 목사는 초교파 교회연합 운동을 별로 안 해 봤었다.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게 당시 옥한흠 목사에게 연합 운동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하고, 이 운동에 앞장서게 도운 일이다. 옥한흠 목사는 이때부터 연합 운동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활동에 전폭적으로 물질과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리든 신학이든 따지지 않고 한국 교회 연합과 갱신, 일치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목회자들의 모임은 진지하면서도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한국교회교단장협의회를 만들기 직전이었는데, 결국 기득권을 잃기 싫어하는 세력에 의해 깨져 버려 옥 목사가 그때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당시 연합 운동을 하면서 옥 목사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설교의 폭이나 주제 역시 개 교회에서 한국 교회로 시야가 넓어졌고, 설교 주제도 교회 갱신과 개혁이 설교의 한 장르를 차지할 정도가 됐다. 어찌 보면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옥한흠 목사와 나를 교회 개혁의 설교자로 사용하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원봉사나 사회 복지 활동도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 개 교회 목회자로서 설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와 교단 연합 활동 등 교회 밖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흘러넘치도록 설교자로서 부족한 종을 들어 쓰셨다고 생각한다. 자격 없는 종에게 부어 주신 축복이라 감사드릴 따름이다. 이런 세상을 향한 그리고 교회 개혁을 향한 설교 역시 후배 설교자들이 그 맥을 잘 이어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