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중세(the Middle Age)를 일컬어 종종 ‘암흑기’라고 부르는데, 이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이탈리아의 계관 시인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다. 1536년 제네바인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주화에는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Post Tenebras Lux)라고 새겨져 있다. 결국 중세는 ‘어둠’, 종교 개혁 시대는 ‘빛’이라는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중세는 과연 암흑기였는가? 우리는 이제 인내를 갖고 천천히 중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에 대한 균형 있고 정당한 평가에서 종교 개혁에 대한 평가 역시 바르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에 대한 평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중세로 볼 것인가에 대한 연대 구분만큼이나 다양하다. 먼저 중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469년의 교황청 도서관 사서였던 지오반니 안드레아(Giovanni Andrea)다. 그는 르네상스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시대가 과거와 다름을 깨달았다. 이런 역사적 성찰은 17세기에 이르러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 중세,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낳았다.
자크 르 코프(Jacques Le Goff)는 장기적 중세를 주장하면서 4세기에서 9세기까지를 중세 초기로, 10세기에서 14세기를 중세 중기로,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 말기로 봐 중세를 넓은 연대 구분으로 접근했다.
코플스톤(Frederick Copleston)은 철학사의 관점에서 교부 시대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5세기를, 교회사적으로는 마지막 교부이자 첫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세를 기점으로 6세기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봤다. 특히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와 같은 경우 중세를 476년에서 1492년까지라고 못 박기도 했다. 또 위키백과를 비롯한 세속사의 관점에서는 로마의 멸망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곧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년을 중세로 본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역사이므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313년, 즉 4세기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까지로 보는 연대 구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중세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1,0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를 단순히 암흑기였다는 몇 마디로 끝내버리기에는 그 역사가 너무나도 유구하다. 그래서 오캄연구소의 유대칠 박사는 에코의 책을 서평하면서 ‘중세는 억울하다’라는 말로 중세의 깊이를 설명했다. 왜냐하면 현대는 중세의 자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경우는 그의 대작 『중세』의 서문에서 수많은 진부함이 중세를 억누르고 있으므로 차라리 중세는 무엇 무엇이 아니라고 열거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 12가지의 ‘중세는 아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고전작가 하위징아(Huizinga)는 흐로닝언 교외를 산책하던 중 저녁 하늘을 쳐다보면서 저물어 가는 중세가 나름대로 석양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착안해 『중세의 가을』(Herfsttij der Middeleeuwen)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심지어 자크 르 코프는 중세의 천 년을 암흑이 아닌 ‘위대한 천 년’이라고 말했다.
또한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중세를 평가하면서 중세의 빛은 성경 말씀이 발산하는 태양 빛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전승이라는 별빛과 달빛이었다고 하면서, 이 빛이 야만성과 이교성의 암흑을 뚫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냈고, 위대한 종교 개혁의 광명한 빛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지한 민족을 비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결국 그는 중세 교회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런 중세에 대한 다소간 호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중세는 그 천 년의 역사만큼이나 미스터리와 혼돈, 무지와 맹신, 그리고 광기로 넘쳐난다. 그렇다면 중세의 진짜 얼굴은 과연 무엇인가? 중세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중세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 무엇이 중세의 옷을 입혔는가? 그리고 중세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중세로의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중세로의 여행
만일 어떤 선교사나, 신학자가 소위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복음이 온 세계에 충만하고, 모든 의심과 불신이 떠나가며, 어린아이처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종교가 과학과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교회가 세상을 주도하고, 대학을 설립하며,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나의 언어로 예배드리며, 모든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통해 살아가는 기독교 세계를 꿈꾼다면, 그는 인류 역사에 그런 시대가 이미 천 년이나 존속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이번 중세로의 여행이 안겨다 줄 첫 번째 충격이다. 그래서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중세는 바로 신앙의 시대이자, 기독교의 시대(Christendom)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과 교회 음악을 사용했다. 건축은 고딕 양식으로 통일돼 있었고, 지붕은 붉은색으로 통일돼 있었다.
마을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서도 보였다. 성당의 종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일어나고 잠들었으며, 성당 묘지는 천국과 영생을 의미했다. 중세인들은 천사와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 연옥이라는 가상의 사망 후 세계를 수용했다. 수사들이 야만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한 사람의 회심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도시와 한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설교나 교리 교육을 통해 회심하지 않았으며, 세례 고백의 뜻조차도 모른 채 라틴어로 그것을 암기했다. 켈트족과 튜턴족, 슬라브족이 복음으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함께 문자, 학문, 농경, 법, 예술을 받아들였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개종마저 이뤄졌다. 과학과 예술도 종교에 동의했고, 심지어 황제마저도 종교 앞에 무릎 꿇었다.
한편 중세의 정치, 경제, 사회는 봉건제라는 튼튼한 사회구조 속에서 숨 막힐 정도의 경직성과 해학성을 지녔다. 중세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성직자, 기사, 농노다. 이는 곧 기도하는 사람(gededmen), 싸우는 사람(frydmen), 일하는 사람(weorcmen)이었으며, 3개의 신분이자, 계급이었다.
또한 중세를 떠받치는 두 기둥을 꼽으라고 한다면 기사와 학자를 들 수 있는데, 박사 학위의 학자들에게는 기사의 작위와 같은 특혜를 부여했다. 가장 중세적인 이미지를 가졌던 것은 기사들이었다. 중세의 기사단은 사제와 귀족을 보호했는데, 마치 미가엘이 천상의 기사단이라면 기사단은 천사의 집단을 지상에 복제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실상 기사단은 금욕과 절제, 이타심, 충성심 외에도 로맨스와 결투 신청, 기사 서약과 맹세 같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녔었다.
최초의 기사단은 예루살렘 기사단, 스페인 기사단, 신전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었는데, 이는 수도자들의 종단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단들이 생겨났다. 황금 양털 기사단, 성모 기사단, 황금 방패 기사단, 심지어 고슴도치 기사단과 사냥개 기사단까지 등장했다. 기사 계급은 사제와 농노 계급 사이에서 경직된 중세 사회를 해학과 상상으로 이끌며 종교와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세는 쌍두마차 사회였다. 곧 교황과 황제가 이끄는 갈등 구조는 불화와 투쟁의 역사로 점철됐다.
특히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로마 교황만이 보편적 교황으로 불려야 마땅하다”라고 했고, 이후에 ‘성 베드로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런 권력의 갈등은 영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대결이 됐다. 이것이 샤를마뉴 시대에 와서는 황제-교황이라는 ‘제왕적 사제직’으로 나아갔고, 1077년에는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나타났다.
특별히 중세 교회는 언어의 다양성을 원죄의 결과들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중세 문명의 통일성, 나아가 유럽 문명의 통일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라틴어를 고집했다. 라틴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는 야만인이요, 짐승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라틴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특권을 가진 집단을 의미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곧 라틴어를 뜻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은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만을 사용했고, 라틴어로만 예배하고 모든 종교 음악은 라틴어로 불렀다. 이는 단일 언어를 통한 통제였다.
또한 중세를 형성한 주요 요소로는 수도원과 대학을 들 수 있다. 중세는 천상과 지상이 혼재한 시대였다. 특히 인노켄티우스 3세가 남긴 ‘세속 경멸론’에서 볼 수 있듯이 중세인들의 마음에는 ‘세속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추구가 있었다. 은둔주의는 수도원을 낳았고,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은 민중에게 위선의 상징이 됐다. 왜냐하면 이들이 교황청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교황의 교권을 위해 동원됐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한때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었지만, 가장 타락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사들의 수도복은 유럽의 복식 문화에, 수도원의 식단은 유럽의 보편적인 식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수도원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좌 성당 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학교와 교육의 발전을 촉진했고 마침내 볼로냐와 파리에 최초의 대학이 들어섰다.
중세 대학은 3학(문법학, 논리학, 수사학)과 4과(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자유 학예에서 의학, 법학, 신학의 상위 학부가 설립됐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으로 귀결됐다.
마지막으로 중세의 역사에서 십자군 원정과 도시와 상업의 발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외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지만 유대인 대량 학살과 약탈 등의 이미지를 남겼다. 또한 상업의 부활과 함께 중세 도시가 탄생했고, 농촌에서는 장원이 생겨났다. 이외에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종교 재판을 통해 마녀사냥이 있었고, 중세인들은 여행을 즐기는가 하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
중세는 현대를 비춘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대작 『중세』에서 “중세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라고 묻는다. 15세기에 본격적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중세는 근대라는 시대 앞에서 과거라는 액자에 갇혀 버렸지만, 이 액자는 ‘박물관은 살아 있다’와 같이 다시 21세기의 타임스퀘어와 천안문 광장, 그리고 광화문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중세가 현대의 자궁이 돼 중세인들이 가졌던 모든 상상과, 광기, 혼돈이 21세기에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중세에는 성경보다는 전승에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중세는 성경 없는 종교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줬다. 성경의 빛은 희미해지고 라틴어는 읽을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호와 같은 진리가 돼 버렸고, 확신의 가능성은 종교 회의와 신화, 전승에 뒀다. 그 결과 중세의 교회는 계시의존적 종교가 아니라 인문학의 종교가 되고 말았다. 중세인들은 성경의 종교가 아닌 상상의 종교를 믿었고, 그 결과 중세는 판타지로 넘쳐났다. 따라서 중세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이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중세는 섬뜩할 정도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지녔는가 하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통제받지 않고 드러나는 해학성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세속으로부터의 도피, 로맨스와 에로스가 혼재했다. 성경의 언어, 강단의 언어, 종교의 언어는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가 돼 버렸고, 성경의 모유를 공급받지 못한 채 종교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타락, 모든 기형, 모든 맹신을 보여 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면죄부와 천사들과 성인들, 성지 순례와 십자군 원정이 공덕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중세는 성경의 경계를 넘어 신화와 전승을 수용했고, 그 결과 연옥과, 천사 숭배,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를 받아들였다. 또한 종교가 정치와 한 마차에 오름으로써 종교가 권력을 가질 때 보여 줄 수 있는 최악을 드러냈다.
나는 작년 여름 한 달간 유럽에 머물면서 중세가 다시 현대를 비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1세기는 포스터모더니즘을 통해 성경을 밀어내고 있다. 성경은 읽을 만한 인문학 도서가 됐고, 불변하는 진리가 아닌 교양이 됐다. 이렇게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종교 개혁에서 현대로 오기까지 약 500년 동안의 유산이 도전받기에 이르렀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현대는 무서운 역주행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은 오늘의 교회가 무엇을 붙들어야 할 것인지는 분명하다. 성경을 잃는 것은 곧 중세로의 회귀를 의미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