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개혁 임종구 목사_ 푸른초장교회
올 한 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많은 학회와 행사들이 있었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종교개혁을 테마로 한 신간들이 쏟아졌고,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글과 논문이 발표됐다. 본지에서의 ‘교회와 개혁’이라는 종교개혁 시리즈도 어느덧 마지막 회를 맞았다.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개혁은 제네바(Geneva)에 와서 좀 더 정돈됐고, 프로테스탄트가 근대를 여는 규범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비텐베르크나 제네바의 사람도 아니요, 16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4차 산업혁명(4IR)이 세상의 화두가 됐고, 인공지능(AI)이 몰고 올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에서 밀려난 사람을 ‘잉여인간’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맞춤형 아기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제 비텐베르크와 제네바를 넘어 아시아와 한국의 종교개혁을 말할 차례가 왔다. 종교개혁은 어떻게 한국 땅에 왔고, 어떤 유산을 전해 줬으며, 어떤 과제를 남겼는지 살펴보자.
초창기 한국 교회와 종교개혁
16세기 서유럽의 종교개혁은 먼저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의 모습으로 아시아 대륙을 밟았다. 로마가톨릭은 1549년에 일본에, 1583년에는 중국에 선교사를 보냈다. 이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명을 정치적인 힘을 통해 가져왔다. 이들이 가져온 것은 비단 복음만이 아니었다.
중국에는 마약(아편전쟁, 1840)을, 한국에는 전쟁(임진왜란, 1592)을 가져왔다. 1552년에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가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고 이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메스(Comez) 신부와 함께 미사를 행하며 한국에 들어왔고, 실제로 선교 활동도 해 개종자가 나오기까지 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볼모로 청나라에 간 소현세자가 기독교를 접하고 돌아올 때 신자 5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한국 가톨릭은 1777년 천주교 교리연구모임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후 1784년에 이승훈이 첫 영세를 받았고, 정약용은 성경 번역에 참여했다.
그리고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서품됐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은 신유박해, 경신박해, 병인박해, 신미양요로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다. 예수회가 주축이 돼 진행된 로마가톨릭의 아시아 선교는 정치적으로 유럽 대륙으로 진출한다. 그 과정에서 강제 개항과 불평등 조약, 전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결국 중국은 청 왕조가 무너졌고, 한국은 조선 왕조가 무너졌다. 로마가톨릭의 아시아 선교는 메이지유신과 양무운동, 신해혁명의 도미노를 불러왔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종결된다.
한편 개신교 선교는 로마가톨릭의 선교에 비해 시기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정치적 접근이 아닌 순수한 선교의 측면에서 진행됐다. 특히 초창기 한국 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한 선교가 아닌 자생적 선교였으며, 성경 번역과 성경 연구가 중심이 됐다. 1885년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유입됐고, 1887년에는 자생적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1878년에는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의 도움으로 요한복음을 번역했고, 1887년에는 성경 전체 번역이 완성됐다.
이수정 역시 일본에서 1885년에 신약을 출판했고, 이 성경을 들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했다. 선교사들의 입국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로, 1884년에 알렌(Horace N. Allen)이 들어와 제중원을 세웠고, 1907년에는 미북장로교회, 미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조선독노회가 세워졌다. 또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미북장로교 소속의 맥코믹과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들이 교수진을 형성했는데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곽안련(Charles A. Clark), 이길함(Graham Lee), 블레어(William N. Blair), 로즈(Harry A. Rhodes), 어도만(Walter C. Erdman), 함일돈(Floyd E. Hamilton), 소안론(William L. Swallen) 등이 있었다.
이들은 소위 16세기 종교개혁의 유산을 가지고 한국 땅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의 한국 교회 유입 과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들은 개혁주의 전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했던 청교도 배경의 선교사들이었고, 초창기 한국 교회의 사경회를 비롯한 미션 스쿨의 설립, 성경구락부와 같은 선교 형태를 형성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초창기 한국 교회의 구호였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은 어느 정도 이 같은 신학적 배경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초창기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영향력이 컸다. 감리교회는 1884년 맥클레이(Robert S. Maclay)와 1885년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를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선교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남감리교, 북감리교로 나뉘어 있다가 1930년 양주삼 목사를 최초의 감독으로 선출하면서 하나의 감리교회로 연합됐다. 침례교회는 1889년 말콤 C. 펜윅(Malcom C. Fenwick)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고, 원산을 중심으로 북간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전쟁 이후 침례교회는 미남침례회의 후원으로 발전했다. 성결교회는 1901년 카우맨(C. E. Cowman)과 킬버른(E. A. Kilbourne)에 의해 설립된 동양선교회가 1907년에 정빈, 김상준이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움으로 시작됐다. 1911년에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했고,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의 명칭을 새롭게 정한 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한국 교회의 빛과 그림자
앞에서도 살펴본 대로 한국 교회는 자생적이면서 성경이 중심이 된 교회였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 운동은 바로 이런 초창기 한국 교회의 긍정적인 요소들이 구체적인 열매로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 또한 선교에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 마땅히 대안이 없던 한국 사회에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됐고, 교육, 선교, 복지, 문화의 전 방면에서 한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특히 3·1운동과 국채보상운동, 의식개선운동에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소외 계층과 어린이, 여성의 인권과 지위를 향상시키며 한글을 발전시키고 주류 언어로 자리 잡게한 일 역시 개신교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끝나면서 북한 교회는 해체됐고,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발전을 이룬다. 한국 근대화에 끼친 기독교의 역할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196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한국 교회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도 있었다. 이를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장 위주의 사회 분위기를 초월하지 못한 점이다. 전후 한국 사회는 혼란과 아울러 경제를 기본으로 성장에 대한 욕구가 사회 전반에 넘쳤다. 가난은 의심할 바 없이 극복해야 할 우선 과제였다. 그런데 교회 역시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장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교회에서의 그것은 ‘기복주의’로 나타났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성장 이외의 과제들을 미처 다루지 못한 채 많아진 고속도로만큼 교파는 늘어났고, 수출 규모가 늘어난 만큼 교세도 증가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수적 중심 성장은 마침내 한국 교회에 독이 돼 돌아왔다.
둘째, 토착 종교를 초월하지 못한 점이다. 흔히 ‘유불선’으로 불리는 토착 종교의 신앙 정서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유교적인 기독교, 불교적인 기독교, 도교적인 기독교의 그림자가 반영된다. 이것은 한국 교회 신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회상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교회에서 존경받는 목사란 서재에 책이 많고, 언제나 책을 읽어 지성을 갖춘 목사인데 이것은 유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고, 새벽기도를 비롯한 깊은 기도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불교적 영향이며, 가난에도 불구하고 돈에 초연해야 한다는 생각은 도교의 영향이다.
아울러 항존직을 종신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직분을 신분의 차원으로 받아들여 교권주의가 만연해졌다. 서리집사 제도와 명예, 공로 직분까지 남발하고, 장로교회가 아닌 교파에서조차 장로직을 두는 것은 모두 뿌리 깊은 유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새벽기도를 비롯해서 예배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머물고, 신앙의 자리를 삶의 현장까지 끌어오지 못한 것은 수행 중심의 불교와 도교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준다.
셋째, 한국 사회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다. 구한말과 근대화의 일정 기간까지 한국 개신교는 시대를 이끄는 지위를 가졌다. 수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사회에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 문제를 치유하며 변혁시키는 위치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눈물과 희생, 헌신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범이 될 만한 부분보다 자신 있게 내놓지 못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1990년 성장이 정점을 찍은 이후 한국 교회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이 시점까지 끝없는 몰락은 계속되고 있다. 세상을 염려해야 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염려스러운 눈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빛과 그림자를 논하기에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은 실로 더 가혹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에 교회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으로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전체 교회의 50%가 넘었고, 이른 바 ‘가나안 성도’와 같은 교회에 식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 이 시대의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잃어버린 종교가 됐다.
남겨진 종교개혁의 과제와 전망
그렇다면 이제 한국 교회에서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다시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으며, 남겨진 과제와 전망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됐다. 천년의 중세는 외견상 굉장히 안정된 시대였다. 도시 중심에 세워진 대성당의 종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정돈된 일상을 살았다.
종교적인 언어와 세속의 언어가 구분됐고,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태어나면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죽어서는 성당의 묘지에 묻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빛 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계시의 빛은 누리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16세기의 사람들의 지성이 진리의 빛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지만, 도시의 네온사인 사이에서 무너져 가고 있는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그야말로 성경의 위기, 인간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맞았다. 서유럽과 표준 문서의 땅은 모슬렘으로 덮여 가고, 동유럽의 기독교는 여전히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의 땅도 세속주의로 넘쳐나고, 대륙을 초월해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가 넘쳐나는 탐욕을 처리하지 못해 간경화 증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인간성과 정경성의 위기를 맞았다. 아담이 선악과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을 당했다면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AI)에 의해 직장에서 밀려나게 됐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의 심장과도 같았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인간의 지성에 거치는 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00년 전에 개혁(Reformation)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회복(Restoration)해야 하는가?
첫째, 정경의 회복이다. 500년 전에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가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오직 정경’이라는 구호를 외쳐야 한다. 정경성이 무너지면 마치 세상은 마치 신호등이 없는 도로와 같아진다. 감춰졌던 성경이 이제 만인의 손에 들려졌지만 정경으로서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인문학 서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먼저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모든 설교자들이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교회는 표준 문서를 가르치고, 성경의 눈으로 세상을 읽으며, 성경의 힘으로 세상을 치유해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주일학교의 위기, 다음 세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학생의 복음화율이 2~3%에 머물고 있다. 가정에서는 가정예배가, 교회에서는 체계적이고 전인적인 신앙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장년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신앙 교육을 해야 한다. 신비주의, 신사도주의, 기복주의를 갖고서는 한국 교회가 회복될 수 없다.
둘째, 인간의 회복이다. 4차 산업혁명(4IR)시대에 가장 위기에 처한 것이 인간성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는 아웃소싱(outsourcing)과 다운사이징(downsizing)으로 기계에 밀렸고, 이제는 인공지능에 밀려 마침내 잉여인간의 자리로 내려앉게 됐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가 회복돼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타자에 대해 이해가 새로워져야 한다. 극단적 공동체성이 교회 밖의 타자를 적으로 바라보는 극단주의를 낳아서 오히려 교회가 섬이 돼 버렸다. 교회는 마음을 열고 세상을 끌어안아야 하며, 이웃의 슬픔에 대해서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신자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시민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셋째, 교회의 회복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성경의 회복과 인간의 회복은 교회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직무다. 특히 한국 교회는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의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 직분이 신분이 되고 권력이 된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갈등 해소에 빼앗기게 된다. 오늘 우리는 연약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자, 칼뱅이 말한 상처 입은 세상을 끌어안는 어머니가 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세상을 변화시킬 생명과 힘이 진정한 복음에 있음을 교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