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디사이플 고(故) 은보 옥한흠 목사
훈련 실패의 책임, 100% 목회자의 몫
제자훈련의 성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이다. 제자훈련 실패의 책임은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반대로 제자훈련 성공의 책임도 100%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제자훈련 실패의 책임을 단 1%도 평신도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지식 전달 중심의 성경공부는 좀 못 가르칠 수도 있고, 잘 가르칠 수도 있다. 반면, 제자훈련은 한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마치 아기를 열 달 품었다가 진통을 해서 낳은 산모의 고통과도 같다. 목회자에게도 그런 산고가 훈련 과정 중에 있어야 한다.
제자훈련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데 목표를 두는 사역이다. 그러니 이론으로 따지면 불가능하다.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솔직히 자기 집안 식구도 못 바꾸는데, 완전히 관계없는 제3자를 데려다 놓고, 제자훈련을 하면서 예수를 닮는 수준에까지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성숙과 헌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제자훈련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이, 목회자의 손에 제자훈련의 성패가 100%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목회자는 자신의 은혜와 소명, 은사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첫째, 목회자는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던질 만큼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 소명감이 있는가? 이것은 제자훈련과 관계가 없이,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체크해야 될 부분이다. 목회자가 얼마나 은혜를 아는 사람이냐, 얼마나 소명을 가진 사람이냐, 이 두 가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제자훈련에 실패하는 이유 중, 이 부분에서 걸리는 목회자들이 꽤 많다고 본다. 본인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니까, 은혜로운 제자훈련이 불가능한 것이다. 정말 복음 앞에서 감격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변화됐는지를 묻고 싶다. 주님께 헌신하고, 복음의 은혜를 아는 목회자가 하는 제자훈련과, 은혜의 경험이 없는 목회자가 하는 제자훈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요즘 목회자의 세계는 은혜가 점점 메말라 간다. 물론 간혹 어떤 목회자는 멋모르고 그저 제자훈련이 좋아서 하다가 오히려 은혜를 받기도 한다. 처음 출발부터 은혜를 알고 제자훈련을 선포할 수도 있지만, 순전한 마음으로 제자훈련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은혜받고 평신도와 함께 변화돼, 제자훈련 사역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가 은혜받은 사역자가 될 수 있느냐’ 이 점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제자훈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목회자들을 보면 기도를 잘 안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직접 은혜받으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가도 성도들을 섬기다 보면, 정작 자신은 잠깐 앉아서 기도 몇 마디하고 끝나 버려 기도할 시간이 없다.
또한 목회자는 참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담아 그 뜨거운 가슴 때문에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은혜가 메마른 자리에서 훈련을 하는 것은 비 안 오는 땅에 묘목을 심는 것과 같다.
자신이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본인 스스로 체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묵상한다든지, 틈틈이 앉아서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됐는지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깊은 감동으로 젖어드는 마음이 있다든지, 성경을 읽다가 어떤 말씀에 붙들려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든지 등 스스로 체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슴이 냉랭하면 그 목회자는 은혜가 없는 것이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가슴이 썰렁하다. 썰렁하기 때문에 남 앞에서는 더 요란한 쇼를 하고, 제스처를 쓰게 된다.
은혜는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은혜를 유지하고, 그 은혜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며, 은혜를 계속 가꾸는 작업이 중요하다. 교회 사역이 점점 목회자들을 바빠지게 한다. 제자훈련의 경우 똑같은 일을 매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목회자는 은혜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은혜 유지하기 1. 설교를 준비하며 은혜에 젖어라
개인적으로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제자훈련이었고, 다른 하나는 설교 준비다. 과거 신학교를 다닐 때는 나를 감동시키고, 은혜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해 주는 설교자들이 내 주변에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식었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고, 나 자신이 다시 십자가 앞에 다가가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계신 주님과의 교제를 체험했다.
그러나 내가 목회자가 되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부터는 감동적인 설교자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큰 불행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을 메우기 시작한 것은 설교 준비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했다. 사랑의교회를 은퇴하기 전에는 제자반에 들어가 평신도들을 앉혀 놓고 훈련시키다가, 나 자신이 은혜받을 때가 많았다. 내가 은혜받는 것 때문에 평신도들도 역시 함께 은혜를 받았다.
이런 은혜의 선순환이 이어지니 목회자인 나도 살고, 평신도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제자훈련 사역을 부교역자들에게 다 넘기면서 나에겐 엄청난 도전과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더욱더 설교 준비에 몰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교 준비에 몰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선배들의 설교나 글, 주석 등을 많이 접하면서 말씀을 깨닫는 은혜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것은 목회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요즘같이 설교를 쉽게 준비하고, 적당히 짜깁기해서 설교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목회자의 영성이 점점 메말라 간다. 요즘 말로는 영성이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일설교, 저녁설교, 새벽설교, 수요예배 설교 등 목회자가 해야 할 설교가 많다 보니, 설교가 은혜의 샘물을 찾아가는 길이기보다는 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적으로 잘 처리하면 된다. 예를 들면 주일설교는 어차피 준비를 철저히 해야 되니 차치하고라도, 새벽기도는 본문을 시리즈로 다 설교하기보다, 읽으면서 느낀 것과 깨달은 것을 간단하게 전하면 된다. 또 수요예배 설교는 성경 한 권을 선택해 꾸준히 강해설교하면, 목회자도 배우고 평신도들도 배우면서 은혜에 젖게 된다.
이렇게 설교를 차별화시켜 준비하면, 절대 시간에 쫓겨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심방 시에도 그때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갖고 들어가면 된다. 그걸 놓고 한 시간씩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부교역자에게 설교의 기회를 자주 주면 담임목사의 영적, 육체적 리듬이 깨지지 않고, 설교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잘 유지할 수 있다. 바쁜 목회자에게는 사역의 지혜로운 선택과 집중의 습관이 필요하다.
은혜 유지하기 2. 가정예배 등 개인 노력이 필요하다
간혹 후배 목회자들이 어떻게 말씀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 문의하는데, 그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되는 게 아니다. 목회자는 누구한테 의지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목회자의 바쁜 라이프 스타일이 문제가 된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문화 변혁을 통해 찾아오는 시대적 도전일 뿐이다. 2천 년 전 우리의 위대한 신앙 선배들이 시작했던 그 영적인 세계를 지금도 유지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2천 년 전의 은혜와 사역의 본질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은퇴를 했기 때문에 설교할 기회가 별로 없고, 과거처럼 설교 준비하며 은혜를 체험할 기회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내와 함께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린다. 이 가정예배가 나의 은혜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아내를 앉혀 놓고 같이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드린다. 주로 내가 기도를 인도하는데, 혼자서는 힘없이 그냥 몇 마디 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지만, 앞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내게 영적 긴장감을 주고, 그 긴장감은 내가 힘을 쏟고 집중해서 기도하게 만든다.
은혜 유지하기 3. 좋은 책, 설교들을 자주 접하라
그 다음으로 나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좋은 책들을 선별해서 정독하는 것이다. 목회자이니까 기본적으로 매일 성경을 어느 정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은 목회자에게 양질의 자양분을 섭취하도록 돕는 좋은 책들이 너무 많다.
특히 설교자는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깊이가 결정된다. 일부러라도 시간 투자를 해서 읽어도 후회가 없는 책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나는 정독하는 스타일인데, 가벼운 책들은 그냥 차 안에서 슬쩍 보고 끝낸다. 옛날 신학교 다닐 때나 갓 목회자가 됐을 때는 원서를 일부러 사 보지 않는 이상 정말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런데 그 원서를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요즘에는 번역서들이 워낙 잘 나온다.
C.S. 루이스의 책이나 달라스 윌라드, 오스 기니스, 데이비스 웰슨,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필립 샤프, 장 칼뱅, 필립 얀시, 맥스 루케이도, 찰스 콜슨, 헨리 나우웬 등 신선한 인사이트를 불러일으키는 저자의 책들이 너무나 많다.
그 다음 내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과거에 했던 설교들을 다시 한 번 리뷰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는 지금 들어도 파워풀하다. 과거에 철저한 준비 끝에 했던 설교 가운데 나를 감동시키는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나는 그때의 은혜를 회상한다. 그 다음에는 TV나 테이프를 통해서 내가 은혜받고 싶은 사람의 설교를 듣는다. 내가 은혜받기 위해 듣는 것이니까 신중히 선별해서 경청하는 편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회자는 자신만의 은혜의 비밀을 지키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훈련 성공의 키다. 자기만 아는 은혜의 비밀이 없이는 절대로 제자훈련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니 목회자라면 자신의 영적 은혜가 마르지 않도록 자신만의 비밀 무기들을 계속 계발해야 할 것이다.
둘째, 목회자는 소명을 지녀야 한다
목회자는 소명이 있어야 한다. 소명은 지도자가 양 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소명은 주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는 결단이다.
그 소명을 가진 사람은 한 영혼을 놓고도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열정을 가질 것이고, 소명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면 십중팔구는 제자훈련의 매너리즘에 빠진다. 제자훈련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되고 있는가? 은혜의 파고(波高)가 밀려오는 흥분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 목회자는 소명을 받은 목회자다. 소명은 은혜를 담아 나르는 그릇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명에 대해 궁금하다면, 오스 기니스의 《소명》을 여러 번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해 기술한 책 중 이만한 책이 없다. 내가 오스 기니스의 《소명》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목회자의 소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책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은 근본적인 소명이 무엇이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회자가 자신이 훈련시키는 제자들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닫게 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왜 제자훈련을 받아서 주님 앞에 충성해야 되는지,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이 있다는 것을 목회자가 깨닫기를 바라는 측면에서 추천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신학적, 성경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해 깊은 확신을 가진 목회자는 평신도를 지도하는 자세가 그만큼 다르다. 평신도에게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놀라운 소명이 주어졌는데, 목회자인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반대급부로 적용해 자신의 소명을 돌아봐야 한다. 그러면 소명에 대한 인식과 제자훈련 하는 자세도 달라지고, 평신도를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것이다.
평신도도 ‘소명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평신도를 데리고 씨름하려고 안 한다. 씨름을 해도 참다운 제자상과는 거리가 먼 훈련을 하게 된다. 평신도도 목회자도 다 같은 소명자라는 생각이 없으면, 제자훈련의 목표나 제자상이 달라진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셋째, 목회자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
목회자에게는 은사가 필요하다. 은사가 있는 사람이 지도하는 제자훈련과 은사가 없거나 부족한 사람이 지도하는 훈련은 참 많이 다르다. 제자훈련에 은사가 없는 사람이 지도하는 제자반은 지루하다. 이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병든 그룹이 돼 간다. 사람들이 제자훈련 모임을 사랑하고 기다리며, 참석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분위기라면 그 지도자는 은사를 가진 자다. 그렇지 않고 여러 달이 지나도 모이기를 싫어하고, 전화를 해서 강제 동원하다시피 하는 제자반이라면 목회자의 은사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은사 점검은 어렵지 않다. 주일학교나 구역 담당을 하면서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교회 사역을 통해서 확인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자주 있다. 은사가 부족하니 목회가 풀리지 않게 되고, 자꾸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좀 더 패키지화된 목회를 해보려 하고, 여기저기 세미나만 기웃거리는 초라한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하는 목회자로서 은사 개발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장 좋은 길은 제자훈련을 잘 하는 목회자 밑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게 제일 좋은 첩경이다. 제자훈련을 잘하는 목회자 밑에서 5년 이상 있으면서 제자훈련의 경험을 쌓고, 좋은 열매 맺는 축복을 누린 목회자라면 보슬비에 옷 젖듯이 가르치는 은사가 개발되거나 발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현재 제자훈련 모델 교회나 제자훈련에 성공한 목회자들 중 제자훈련을 잘하는 교회 담임목사 밑에서 사역한 부교역자 출신들이 많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국제제자훈련원의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훈련을 정착시키는 비율보다 이미 성공한 동역자들 밑에서 배운 부교역자 출신들의 성공률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본다. 이런 현상은 국제제자훈련원의 사역이 직간접적으로 본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성패 기간, 최소 5년을 잡아야
제자훈련은 절대 첫술부터 배부를 수 없다.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기간을 최소한 5년으로 잡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 제자훈련을 시작할 때는 은혜 없이 시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훈련을 하다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제자훈련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동시에 연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실패와 연단의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개인적 바람은 그런 사람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누구도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오히려 심각한 실수를 해서 제자훈련의 판이 깨지는 것 같은 위기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고, 새롭게 출발하게 하는 하나의 ‘변장된 축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제자훈련을 하려는 목회자들에게 적어도 최소한 5년 이상을 해보고 나서, 실패냐 아니냐를 이야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5년 이상은 제자훈련을 해보고, 내가 은혜 있는 사람인가, 소명 있는 사람인가,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이 없이 몇 번 해보고서 함부로 자신을 속단해서도 안 되고, 제자훈련에 대해 함부로 평가 절하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