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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디사이플 찰스 무어
우리는 경험에 따라 삶에 대해 달리 이야기하곤 한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눈을 경험한 에스키모에게는 ‘눈’이란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일부 부족 중에는 초록과 파랑을 말로 구별하지 못하는 부족이 있다. 그들의 망막이 우리와 다를 바 없지만 단어가 다르기에 볼 수 있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언어란 우리의 경험을 위한 지도와 같다.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교회에 간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이는 단순히 우리가 교회를 가고 있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또한 “언제 교회가 시작합니까?” 혹은 “어젯밤 우리는 모두 교회에서 만났다” 등에는 교회에 대한 경험이 내포돼 있다.
이 내포된 뜻에는 교회란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교회 건물과 그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편화돼 있는 활동이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워낙 자연스럽기 때문에 이런 말이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성경에 비춰 봤을 때 교회란 단순한 장소나 모임을 위한 곳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힘쓰니라”고 말하고 있다. 교제란 서로를 위한 돌봄을 말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44절). 예루살렘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상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서 그들 자신이 교제가 됐다.
안타깝게도 우리 중에는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은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