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03월

“빈곤층의 사역 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 청주우암교회 한영섭 권사

전도행전 김익겸 기자

청주우암교회에 처음 나오면 `반갑습니다`라고 반기는 사람이 있다. 주차팀장 한영섭 권사(64세)이다. 교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던 그가 제자훈련하면서 시작한 주차봉사를 통해 이제는 새로 오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장 먼저 분별할 수 있을 만큼 교회통이 되었다. "빈공층 사람도 사역할 수 있음을 알리는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제자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20년 동안의 교회 아웃사이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천주교 아내를 맞이한 그는 회사 사장이 교회 출석을 권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눈도장을 찍으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내도 자연스레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가듯 교회를 빠져나오기 10년 만에 처음으로 남선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그동안 눈도장 찍으러 나간 이유도 있지만 유달리 숫기가 없던 그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매일 철야기도를 하고 아침 식사 준비로 집에 잠깐 들르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매일 교회에 나가는 아내가 싫기는 했지만 가정을 위해서 애쓴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남선교회 모임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맴돌았다.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왜 아웃사이더로 살아야 했을까? 10년 뒤 그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가 제자훈련을 한다며 1기 훈련생을 모집할 때였다. ‘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제자훈련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에게 담임목사가 전화를 한 것이다.
“제자훈련 받으실 거죠?” “네, 알겠습니다.”
본인이 대답해 놓고서도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재목이 안 된다’며 거부했지만, 마음에도 없는 것은 평소 핑계로 넘겼던 그이지만, 그의 아내 말대로 성령의 인도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목사님의 전화를 받고서 깜짝 놀랐어요. 고학력, 화이트칼라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나 같은 사람이 감히’라며 꿈도 꾸지 않았거든요. 사실 저 역시 두세 번 나가다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택받은 것에 감사해서 자꾸 나가게 되더군요.”
자신을 선택해 준 담임목사의 시선이 고마웠던 게다. 그가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소외감’이었다. 사글세도 내기 힘든 시절이 많았고 심지어 구걸(?)해야 할 정도로 박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삶에다 매일 소주 3~4병은 거뜬히 마셔댔고, 가끔 술 냄새 풍기면서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던 그이다.


전도하기 위해 술 모임을 식사 모임으로
제자훈련을 받을 당시 그는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때문에 한 권사가 수료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아내도, 직접 전화했던 담임목사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한 번의 관심은 제자훈련을 거뜬히 마칠 수 있는 동기가 되었고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위력을 발휘했다.
15개나 되던 술 모임은 제자훈련 중 술과 담배를 끊으면서 자연적으로 멀어졌고, 심지어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처지(?)가 됐다. 이젠 옆에서 담배만 피워도 감기에 걸리고 성찬식 때 마시는 포도주는 술 마셨냐고 물을 정도로 그의 얼굴을 벌겋게 만든다.
아내가 매일 교회에 나가는 게 보기 싫던 그는 매일 새벽예배를 나가지 않으면 허전할 만큼 바뀌었다. 제자훈련을 시작하면서 담임목사로부터 권유받은 주차사역은 새로운 성도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첫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귀중한 자리가 되었다. 1기 제자훈련생들과 함께 시작한 식당 설거지 봉사는 다음 봉사자에게 넘기자는 얘기가 나와도 ‘봉사는 봉사다. 계속하자’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삶이 바뀐 그에게 하나님은 어려운 생활에도 도움을 주셨다. 가능성이 희박한 가운데서도 최근 임대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날 밤 부부는 서로 껴안고 울기도 했다. 이제는 어엿하게 건설현장 책임자로 서게 되었고 그의 말을 빌리면 ‘10~20만 원 정도 꾸어줄 정도가 됐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전도하는 일은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술친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변한 것을 알고 음료수를 시켜주지만 ‘너나 잘 믿어라’라고 말하던 그의 말이 이제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15개 술 모임 가운데 3~4개 모임은 꾸준히 이어간다. 가장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4명에게는 따로 만나 저녁 식사를 산다. 그렇게 전도한 서너 명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제가 부족한 사람이고 겨우 사는데, 누구를 전도할까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믿었던 것도 20년 걸려 천천히 된 것처럼 남을 믿게 할 때도 천천히 인내하면서 전도하려고 해요. 어디 제 맘대로 되나요?”
자신을 향해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서서히 바뀔 것이다’라고 믿고 기도했던 아내처럼, 이젠 그가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향해 인내로써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오래 참고 기다리셨던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는 한 사람에게 3년 전도 계획까지 세우며 인내로 다가가고 있다.


신앙 유산 전하고 빈곤층의 사역 모델 되고파
한 권사는 ‘담임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봉사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물론 그에게 결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부족한 이 순간까지라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불교 집안을 믿음의 가정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 감사하고, 그동안 아이들에게 마땅히 물려줄 것이 없었지만 이제 자랑스럽게 물려줄 것이 생겨서 감사하다. 바로 신앙이다.
한영섭 권사는 자녀들이 ‘엄마같이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내의 기도 덕에 가정이 파탄나지 않고 살았다며 공을 돌린다. 없는 살림에 술로 흥청망청하던 시절, 길바닥에 나 앉을 만큼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아내를 따라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는 모델로, 가난 가운데도 주의 제자로서 사역할 수 있는 모델로 서는 게 소박한 비전이다.
“저는 비록 늦었지만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자녀에게 신앙의 모델이 되도록 열심히 살죠. 교회에서는 빈곤층에 있는 사람도 사역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도 끝까지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