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33년 전 한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 말은 한 부부의 인생에서 큰 주춧돌이 되었다. 이 말은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옥한흠 목사로부터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들은 말이다. 청년시절의 교회생활은 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으나, 그 영향력면에서 오래 가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30, 40대 중년을 넘기면서 교회를 아예 떠나는 사람들도 생긴다. 반면,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의 제자훈련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뿌리 깊은 신앙을 만들어 줬다. 그 증인 중에는 박승빈, 김성숙 부부도 포함되어 있다.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4기 출신인 이 부부는 같은 동기생이다. 이 부부에게 제자훈련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도,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긴장감과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근간이 됐다. 이제부터 그들이 기억하는 제자훈련 체험담을 들어보자.
대학부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소문 퍼졌었다
현재 카이스트(KAIST) 화학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박승빈 교수(52세)와 배제대 전산정보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성숙 교수(51세)는 각각 1973년 대학 입학 후,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만나게 됐다. 박 교수는 부모가 모두 성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배들이 닦아놓은 대학부에 참여하게 됐다. 반면, 김성숙 교수는 할머니가 성도교회 권사로 봉사하고 계셨는데, 성도교회 대학부에 들어가면 훈련을 잘 받는다는 권유를 받고 대학부에 합류한 케이스다.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4기 출신인 이 부부는 ‘대학부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당시 교회 내에서 돌았다고 소개했다. 그만큼 대학부에만 들어가면, 신앙인으로서 잘 훈련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교회 안팎에서 이미 깔려 있었다는 의미다. 당시 대학가 내 데모가 많아 학교 수업을 쉴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대학 4년이 거의 교회생활이나 다름 없었다. 교회 친구와 선배들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박 교수와 김 교수는 대학부 1학년 때 제자훈련을 통해 신앙의 눈을 뜨게 됐고, 2학년 때는 리더가 되어 소그룹에서 후배들을 동시에 지도했다. 수련회 때는 늘 큰 은혜를 받아 삶의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곤 했다. 당시 다른 교회 대학부에서 수련회를 여는 것은 흔치 않았었고, 대부분 놀러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성도교회 대학부 수련회는 체계적이고 타이트한 수련회로, 매번 말씀 충만과 회개의 눈물, 기쁨이 흘러넘치는 수련회였다. 옥 목사는 이런 수련회를 위해 금식으로 준비했고, 청년들은 그런 스승의 준비와 헌신에 매번 감동했다. 또 성도교회 대학부는 당시 공휴일에는 1일 수양회로 우국기도원에 자주 가곤 했다.
대학부 내 각 대학별로 아침에 큐티도 했는데, 늦게 오면 선배들에게 야단을 맞을 정도로 선배들의 군기가 셌다. 대학별 다락방도 운영됐는데, 옥 목사가 직접 각 대학 다락방을 순례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옥 목사님께서 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볼 때는 교회 밖에서 목사님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에 그저 기쁘고 감사했다”고 회상했다.
옥한흠 목사의 미국 유학으로 인해 옥 목사와 함께 한 시간은 2년 반이 전부였다고 밝히는 이 부부는 소그룹 리더가 된 이후에도 옥 목사가 리더훈련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지도했다고 떠올렸다. 특히 김 교수는 지금의 전도폭발훈련의 전신인 이 리더훈련은 케네디의 『현대전도』라는 책을 가지고 훈련받았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용감하게 전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제자훈련 하면서 옥 목사님께서 전도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셨다”며 “그 영향으로 제가 이화여대 학교 식당이나 남대문시장에 사영리를 들고 가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러 돌아다녔었다는 이야기를 최근 동창들에게서 들었죠”라며 웃음 짓는다. 그때 김 교수가 전도한 친구들 중, 복음을 접하고 나중에 김 교수에게 감사하다고 말을 전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박 교수도 마찬가지인데, 복음을 전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로부터 이제 자신이 교회에 나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고 한다.
성령 충만하고 우애가 끈끈했던 대학부
옥 목사는 여름, 겨울 수련회 때 로마서 8장을 대학부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김성숙 교수는 “옥 목사님께서는 본인이 안 하신 것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적이 없었다”며 “직접 우리에게 역할모델이 되어 열정적으로 헌신하며 모든 일을 진행했고, 스스로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은혜받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셨기에 무엇을 배우고 들어도 은혜가 100% 가슴속 깊이 전해졌다”고 증거했다.
대학부 청년들과 밤낮 없이 훈련하며 함께 있기를 즐겨하는 옥 목사가 청년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옥 목사의 부인인 김영순 사모가 150여 명이 넘는 청년들의 이름을 다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 교수는 “당시 사모님께서 대학부 청년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다 알았다”며 “그때 사모님이 뒤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성도교회 대학부에는 주제가도 있었다. 찬송가 ‘그리스도와는 바꿀 수 없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등을 매주 만날 때마다 불렀다. 대학부 리더로 섬기면서 친구처럼 지내던 두 사람은 박 교수가 다니던 서울대 공대 축제 때 함께 참석하며 자연스럽게 이성교제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당시 옥 목사님은 어떤 일이든 하나님 안에서 크게 어긋난 일이 아니면, 반대하시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히려 옥 목사는 율법적이지 않고 예수안에서 자유스러우며 낭만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당시 교회 대학부 선배들이 더 엄격했고 이는 연애문제에도 마찬가지였다. 김 교수는 “이랜드 회장인 박성수 장로의 경우, 제자훈련 2기 선배로서 대학부 내 연애를 강하게 반대했었는데, 연애하는 커플들을 쫓아다니며 반대했었다”고 과거를 추억하며 웃는다.
선후배 간의 우애가 유난히 좋았던 성도교회 대학부는 영적으로 건강하고 성령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후배 청년들 간에 인간적인 우애와 정도 끈끈했다. 선배 리더는 소그룹의 후배들을 언제 어디서나 직접 보살피고 챙겼다. 리더훈련의 경우, 같은 학년 친구들이 남녀 합반으로 함께 훈련을 받도록 했다. 대신, 주일 성경공부에서는 여자 리더는 여자 후배를, 남자 리더는 남자 후배를 양육했다.
신앙의 뿌리를 든든하게 만든 만남
박 교수는 “만약 그 당시 옥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제자훈련을 받았던 친구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반면, 박 교수는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라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바로 설 수 있는지가 건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잣대인데, 당시 20대 때 다른 교회에 다니던 많은 친구들이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보면, 옥 목사로부터 받은 제자훈련의 축복이야말로 어디를 가도 중심을 바로 잡고 설 수 있는 든든한 믿음을 만든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김 교수가 성도교회에 오기 전에 다니던 교회의 고등부 친구들 중, 80%가 30년 사이에 교회를 많이 떠났다. 든든한 신앙의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세상에서 평범한 크리스천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유지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며 “크리스천 교수로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선교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제자훈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됐음은 물론, 인생의 목표도 사도행전 1장 8, 9절처럼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지금도 가끔씩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일인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라”는 옥한흠 목사의 말을 되새김질한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목회자의 길을 권유하지 않았던 스승은 항상 텐트메이커(Tent Maker)를 강조하셨는데, 당시 분위기로는 혁명적인 말이었다. 33년 전 한국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면 신학교 가는 게 당연했고, 그것이 신앙의 완결편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교수로서 정체성 지니며 일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부부는 자신들의 은사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8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각자 미국에서 전공을 살려 공부에 매진했다. 유학생활은 정말 외롭고, 무엇이든지 혼자서 다 해결해야 했다. 하다못해 당시는 한인 교회도 드물었다. 황무지와 같았던 곳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퍼듀대학 유학시절, 한인 교회가 주변에 없어 미국 교회에 참석했다. 그후 두 부부는 자신의 집에서 유학생 커플 부부를 모아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리고 이 성경공부 모임이 주축이 되어 나중에 한인 교회가 탄생되기도 했다. 거기서 박 교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의지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처럼 소그룹에 의한 제자훈련으로 신앙의 기초를 튼튼하게 쌓은 이들은 어디를 가나 신앙이 살아 움직일 수 있음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88년 여름 시카고에서 개최된 코스타집회에서 옥한흠 목사가 강사로 초청돼,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 다시 한 번 스승의 살아 있는 말씀을 온몸으로 들을 수 있어 감사했다.
이후 89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옥 목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삶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박승빈 교수와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느끼게 됐다는 김성숙 교수. 그러나 귀국 후 박 교수가 갑상선과 담석절제 수술을 연이어 받아야했다. 건강에는 늘 자신이 없었다는 박 교수는 큰 수술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됐다.
현재 각자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박승빈, 김성숙 부부. 요즘 대학 분위기는 무엇이든지 짜내서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야 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인자한 풍모의 박 교수는 크리스천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그러나 박 교수는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수로, 그의 제자로서의 품성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반면, 외향적인 성격의 김성숙 교수는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인 ‘싸이월드’에 좋은 글들을 올리며 예수향기를 나타내고 있다. 학기 마지막 수업시간에는 간단하게 복음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교내에 외국인 교수가 많은데, 이들을 모아 성경공부도 한다. 평소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많이 사둔 김 교수는 이들에게 복음 전하는 데도 열심이다.
한번은 그들 중 김 교수에게 영향을 받은 몽골 교수 한 명이 몽고에 돌아간 후에,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대학을 도와준 일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확장하는데 협력하여 선을 이룬, 주님을 깊이 경험하게 만든 일이었다.
최근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4기 모임을 가진 박승빈, 김성숙 부부는 모인 친구들을 보면서 대학부 시절 받은 제자훈련이 현재 친구들의 삶의 모습에 미친 영향력을 목격하며 다시 한 번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몽골선교에 매진하는 부부나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예수의 제자로서 향기를 나타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자부심과 복음전도에 대한 선한 부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박승빈, 김성숙 부부는 “이제 어느 장소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33년 전 옥한흠 목사님으로부터 받아 뿌리내린 제자훈련 정신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됐다”며 스승에게 감사와 사랑이 진하게 담긴 마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