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03월

옥한흠 목사의 제자행전⑦ “제자훈련의 힘은 세대를 이어가며 사람을 세우는 것” - 김재석 교수·김정숙 전도사 부부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30년 전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꽃이 핀 제자훈련의 정신은 그때 훈련받은 청년들의 은사에 따라 각각 여러 가지 모양의 꽃으로 만개했다.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이 함께 제자훈련을 받았지만, 한 가지 색깔로 나타나기 보다는 각 사람의 은사와 열정에 따라 다양한 꽃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핀 꽃 중에는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4기 출신 김재석, 김정숙 부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정 내용을 잘 요약해 쉽고 논리정연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김재석 교수는 현재 연세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몽골의 한 대학에 지식과 복음을 전하는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또 김정숙 전도사는 교수 부인으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떨치고, 본인의 장점인 상담의 은사를 살려 신학을 전공하고, 뉴코아 백화점에서 직장예배 인도와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상담 사역에 헌신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이 왜 인생 후반부에 낯선 곳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지 직접 만나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쟁쟁하던 청년들이 모여 삶의 헌신을 깨닫게 되다
청소년 시절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교회에 처음 나갔다가 대학 1학년때 신앙적 회의가 들어 교회를 떠났던 김재석 교수는 불교와 철학에 탐닉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책과 고고학책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주님을 영접한 경우다. 그후 같은 학과 친구에게서 ‘우리 교회 좋다’는 소개를 받고, 성도교회 대학부에 첫발을 디디게 됐다.
당시 대학부를 지도하던 옥한흠 목사의 메시지가 너무 좋았고, 고학력의 쟁쟁한 대학생들이 도시락까지 싸 가지고 와서 먹으며, 주일날 오후 늦게까지 교회에 남아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신선한 도전을 받았다.
‘여기서 이들이 발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하는 의문과 기대를 품고 대학부 생활을 시작했다. 봄 가을에는 불광동 기도원에서 하는 수련회도 따라갔다. 2학년 어느 수련회에서 옥한흠 목사의 ‘사람의 헌신’이라는 설교를 통해 그는 큰 도전을 받았다. 주님을 영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친구들과 신촌에서 술을 마시며 다녔던 그였다.
그런데 그날 기도원을 내려오면서 길가 술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왜 저것을 마셨나’ 의아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 수련회를 통해 헌신의 의미를 체험했고, 삶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다.


각자의 은사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다
대학교 3학년이 되자 소그룹 리더를 맡게 됐고, 서기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김 교수는 3학년 여름 수련회에 가서 들었던 옥한흠 목사의 ‘에베소서 강해’ 설교가 일평생 들은 설교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자신에게 가장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고 강조한다.
아직도 그때 옥 목사가 설교한 내용이 머리에 남아 있다고 말하는 그는 그렇게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스승과 2년 반을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함께 보낸 것이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힌다. 한때는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던 그다.
그러나 옥 목사는 자신의 은사에 따라 섬기는 평신도 선교를 강조했다. 그런 가르침을 통해 점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지 살피게 됐고, 자신에게 ‘가르침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김 교수는 “후배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종합해 전달하는 게 기쁘고 행복했다”며 “청년들에게 내 비전을 전달하는 교수로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대학부 시절 김 교수 부부는 옥 목사를 비롯해 방선기 목사와 박성수 회장, 박성남 전도사라는 훌륭한 선배 리더들로부터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은 또다시 후배들을 양육하고 세우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멋진 신앙의 친구 및 후배들과 1박 2일 수련회를 하며 한방에서 뒤엉켜 자며 쌓였던 정은 어디를 가도 생각나게 만드는 추억이 됐다.


가르침의 은사 발견, 어디가나 제자훈련하다 
사람을 훈련하고 세우는 일은 그가 유학을 가서나 귀국한 후에도 반복됐다. 전도하고 양육하는 부부로 유명했다.  첫 직장인 구미의 전자기술연구소에서 일할 때, 섬기던 교회의 청년들을 집에 초청해 국수를 삶아 먹으며 제자훈련했고, 유학을 가서도 당시 갈급해 하던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재를 직접 만들어가며 일대일로 제자훈련을 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지금 각 교회에서 청년부 지도자로 섬기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미주 코스타 강사로 여러 번 강의를 하기도 했던 그는 국내외에서 훈련시켰던 청년들이 또 다른 청년들을 양육하는 자리에 서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제자훈련의 힘이구나’를 새삼 느꼈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4,5년마다 집을 이사하게 됐는데, 옮기는 교회마다 청년부 지도부장을 맡아 청년들을 제자훈련 했다. 청년 제자훈련을 처음 시도했던 교회는 김 교수의 영향력에 도전을 받아 성인 제자훈련까지 신설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는 연세대에서도 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틈만 나면 관계 전도를 하고 있다. 기독교 대학이지만 그 색깔이 많이 없어져 안타깝다는 김 교수는 대학원 학생들과 일대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캠퍼스에서도 선배들의 모습 보며 영적 도전받다
반면, 아내 김정숙 전도사는 대학교 2학년 끝 무렵에 성도교회 대학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주만 빠져도 전화와 편지 등 관심이 쏟아졌고, 주일날 예배와 성경공부 시간에는 대학부원 모두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세례는 받았지만 구원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며 살았던 그녀는 제자훈련을 통해 순수한 복음을 만났고,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기분이었다. 그녀 역시 대학 3학년 여름 수련회 때, 에베소서 강해를 듣고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김 전도사는 학교 선배인 지금의 이랜드 박성수 회장의 리드아래 캠퍼스 내에서 영적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다. 아침 큐티 나눔, 점심식사 후 오후 전도 등을 하며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미국 유학기간동안 유학생 아내를 대상으로 상담을 통한 전도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상담 쪽에 은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후 94년 대전으로 귀국해서 목원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회학을 전공하고, 세신감리교회에서 청년부원들 및 결혼한 30대 자매들을 대상으로 한 성경공부를 3년간 인도했다.
그러던 그녀가 방선기 목사의 주선으로 ‘뷰티풀 휴먼’ 회사의 사목으로 직장예배 인도와 상담 활동을 하는 사역에 동참하게 됐다. 원래 하고 싶었던 사역이었다고 밝히는 김 전도사는 매주 4일정도 뉴코아 백화점의 각 지점들을 방문해 상담과정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1년 정도 이 사역을 하고 나니, 지금은 결신자들도 많아졌다.
그녀는 가끔 몸이 힘들기는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직장 안의 복음화를 위해 즐겁게 사역하고 있다. 친구들 중에는 ‘교수 부인으로 점잖고 편안하게 살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믿는 친구들 중에는 ‘부럽다’, ‘사역을 하니 행복하겠다’고 격려해주는 친구들도 많다.  
김재석 교수 역시 연세대 캠퍼스에서 대학부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박성남 선배의 지도아래 삶을 통한 영성훈련을 받았다. 매일 아침 큐티 모임을 통해 성경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받고, 점심시간에 같이 모여 선후배간에 진한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성경암송 뿐 아니라 전도도 함께 동행하며 지도받았다.
그는 “당시 성경만 가지고 큐티 묵상을 나누는 게 좋았는데, 훗날 혼자 성경 하나만 가지고도 묵상할 수 있는 기초가 이때 이뤄진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때부터 큐티를 생활화한 김 교수는 가끔씩 그 시절에 쓴 큐티노트를 보면, 자신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있다고 웃음 짓는다. 더불어 이때 키워진 큐티 실력이 현재의 전공인 엔지니어를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분석력 및 통찰력을 키워주는 큰 기여를 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스승은 따뜻하고 격려를 잘하셨던 분이셨다
김 교수 부부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이 제자훈련을 손에 놓지 않게 되고, 가는 곳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된 것은 모두 30년 전 꿈을 심어주던 스승 옥한흠 목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훈련은 강하게 했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열려 있으며 다가가기 쉬운 따뜻한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김 교수는 “대학부 주보에 글을 한번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사님께서 보시고 멘트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셨다”며 “당시 학생들에게 작은 거 하나라도 발견하면 신경 써서 격려해 주시곤 했다”고 밝혔다. 가끔 김 교수는 “옥 목사님이 대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목사님은 청년들과 함께 대천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어울리실 정도로 친근하셨다”고 떠올렸다. 
대학부에서 리더로 활동하던 김 교수와 김 전도사는 나중에는 대학부 헬퍼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몇 년 후 김 전도사가 광화문 생명의 말씀사 앞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옥 목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한창 교제 중이던 김 교수에 대해 ‘좋은 형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며, 200명이 넘던 청년들 중에 자신들의 교제까지도 관심가져준 것에 감사해 했다.
당시 대학부에서는 연애가 암암리 금지되어 있었지만, 청년부에서는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입학하게 된 김 교수는 군대가 면제되자 평소 백합같이 멋있는 자매로 생각하던 김 전도사를 배우자 후보로 몇 개월 동안 기도하다가 프로포즈를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선택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몽골 선교에 뜻을 모으고 헌신하게 되다
현재 김 교수는 몽골 선교에 많은 역량을 쏟고 있다. 현재 몽골에는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서 세운 대학이 3개가 있는데, 그중에 김 교수가 2개 대학과 연관되어 작년에 몽골에 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김 교수는 현재 목동 제자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이 교회도 몽골 선교에 관심이 많아 몽골국제대학(MIU)의 이사장교회로 섬기고 있다.
몽골 방문시 너무 열악한 학교 상황을 눈으로 목격한 김 교수는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후원의 필요성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혼자 학교관련 팜플렛도 만들고, 후원 동참 자료도 만들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홍보하고 있다. 서울 지역 10여개 대학을 직접 방문해서 크리스천 교수 70, 80명을 만나 몽골국제대학을 소개하고, 장학금과 강의지원을 부탁해서 결실을 맺기도 했다.
그는 “나의 역할은 성도들의 역량을 모아 몽골 선교에 동참하도록 하는 데 있다”며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그 나라를 복음화 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5년에만 네 번이나 몽골에 다녀온 그는 개인적인 재정적 지원만이 아니라 자신의 노하우를 살려 대학교 운영기획을 직접 만들어 주고, 제자교회 청년부 단기선교를 연결시키기도 했다. 2005년 12월에는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4기 출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한번 뜻 깊은 일을 하자’며 몽골선교 프로젝트를 설명하여 후원을 독려하기도 했다.   
김 교수 부부는 “제자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며 평범하게 내 가정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두 부부는 “20대 때 옥 목사님을 만나 제자훈련을 받고, 기라성 같은 삶의 모델인 선배들을 통해 훈련받았기에 ‘저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라는 평가도 받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인생의 후반기에 오는 편안함을 떨치고 남편은 학교 캠퍼스에서의 청년 사역과 몽골선교 사역으로, 아내는 직장 사역자로 열정을 불태우는 두 사람은 자신들의 현재 삶에 무척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다. 20대 가졌던 비전이 나이 들면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꽃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젊음이, 정신이, 은혜가 시간을 넘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두 부부가 피우는 꽃이 앞으로 어떤 색깔과 향기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지 자못 기대가 된다.  


·김재석 교수
연세대 전자공학과 졸업
미국 RPI대학 박사학위
AT&T Bell 연구소 연구원
미주KOSTA 세미나 강사
현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
현 성경번역선교회(GBT) 실행이사

·김정숙 전도사
서울대학교 국악과 졸업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졸업
체리힐교회, 세신교회 전도사
현 뷰티풀휴먼 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