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그동안 ‘제자행전’에 초대된 옥한흠 목사의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제자들의 입에서 지나치지 않고 언급된 이가 있다. 바로 현재 라이브교회에서 담임으로 사역하고 있는 박성남 전도사다.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수제자 중 다섯 명만 손꼽으라면 빼놓지 않고 기명될 만큼, 당시 성령 충만하게 부흥했던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큰 존재감으로 활동하던 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중심에서 함께 했던 박성남 전도사의 두려움 없이 전진하고 있는 삶을 통해 그에게 과연 제자훈련은 어떤 영향력이 있었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에게 투영됐는지 그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다.
호기심 갖게 한 옥한흠 목사와 모델이 된 방선기 목사
그는 성도교회 중직자 가정의 아들로 이미 교회생활이 익숙했다. 고3 시절 당시 옥한흠 전도사가 부임해 유년부와 대학부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교회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멀리서 선글라스를 쓴 옥한흠 전도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교역자는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정됐던 그에게 선글라스를 쓴 전도사의 모습은 특이했다.
특히 옥 목사를 만나기 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은 직장사역연구소의 방선기 목사였다. 그가 고3일 때 서울대학교 1학년이었던 방 목사가 수업이 끝나면 자신을 포함해 한인권, 최충선, 고재승 등 4명과 함께 교회에서 방을 빌려 합숙하며 공부 지도를 했다. 방 목사는 고3 생활을 교회 후배들을 위해 두번 한 것인데, 크리스천답게 꿈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자며 신앙과 학업에 있어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도했던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형이었던 방 목사님이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중·고등학교 때 대부분 진학에 실패할까 봐 교회에 계속 나오느냐로 고민하던 시절, 오히려 방 목사님은 교회생활에 열심이었고, 학교도 좋은 학교에 진학해 당시 후배들 사이에서는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대학부가 생긴 후 옥 목사가 앞에 서서 나가면, 그 가운데서 후배들을 챙기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성도교회 대학부 제자훈련 2기 출신인 박성남, 한인권, 박성수, 한정국, 김광일, 노현숙, 이성옥 등이 그 뒤를 이어 나가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한인권 장로가 한정국 선교사를, 박성남 전도사가 박성수 회장을 성도교회로 전도해 왔는데, 연세대 1학년 때 같이 어울려 다닌 이랜드 박성수 회장과 그의 인연은 그 후로도 그의 삶 속에서 이런저런 연유로 깊숙이 관여하게 됐다.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삶의 꿈을 심어준 스승
대학부 시절 그는 무엇보다 성경 말씀이 재미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그 많은 성경공부를 했지만, 말씀이 삶과 연결된다는 것을 옥 목사로부터 처음 맛봤던 것이다. 옥 목사가 그룹 성경공부 후, 15분 동안 짧게 정리해 준 게 너무 멋지고, 흥미로웠다. 또 수련회 때마다 옥 목사가 전해준 메시지가 즐거웠고, 말씀에 젖어 있는 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대학부 리더훈련 때는 주제를 던지고 청년들에게 자율성을 줘서 충분히 토론하도록 했다. 옥 목사의 사택에도 자주 쳐들어가 밤을 새가며 이야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방향성을 잡아갔다. 그때 옥 목사가 교회 안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가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야 한다고 꿈을 심어준 게 그에게는 일평생 삶의 화두로 남게 됐다.
그는 스승이 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과 방향성을 놓고 씨름하셨고, 대학부 임원들의 대학교 학점까지도 일일이 챙겼다고 기억했다. 초기 성도교회 대학부가 형태를 잡아가는 시기라 제자훈련 2기, 3기, 4기생에 이르기까지 그가 직접 총무로서 여러 모임 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면 안 됐고, 앞에 나서야 했다. 그는 “당시 대학부를 너무 좋아했고, 어느 때는 집회가 다 끝난 다음 아무도 없을 때도 대학부 예배실에 혼자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며 “이런 대학부 생활은 특권이었고, 이렇게 좋은 목회자와 선후배들과 함께 평생을 교제했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병 중에 삶의 중요한 사람들을 모두 만남
한편 옥한흠 목사가 대학부와 함께 대학 캠퍼스별로 다락방을 운영했는데, 그는 연세대 캠퍼스를 통해 김재석, 김명수, 이세웅, 한상희, 나재순, 박영희 등의 후배들을 지도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후배 중에 가장 친했던 이인호도 있었다. 그는 현재 명성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섬기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생활과 여러 번의 재수 끝에 학교에 들어와 같이 운동도 하고 신앙 이야기도 많이 나눠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같이 그는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당시 수련회에 갔다 오면, 지금의 숭의여전 밑에 ‘티파니’라는 분식집이 있었는데, 비빔냉면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련회 뒤풀이를 했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과 축구공만 있으면 삶을 재미있게 살 거 같았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대학교 3학년 때 허리디스크에 걸려 대학 4학년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대학부 생활도 못하고 집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때가 74년이었는데,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찾아왔나, 잘못한 게 많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이 시기는 하나님 안에서 신앙이 정리되고,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을 모두 다 만나게 되는 시기가 됐다. 방 안에만 있던 그는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코르셋을 허리에 차고 캠퍼스 사역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연세대 학생회관 한 귀퉁이에서 큐티를 하고, 점심 때 후배들을 만나 성경공부도 하고 전도도 했다. 지금의 아내도 이때 만나게 됐다. 당시 박성수 회장도 근육무력증이라는 병에 걸렸는데, 둘은 서로 어려운 시기를 격려하며, 위로하고 다시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하고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그때의 병이 세상적인 생각의 잔가지를 치게 만드는 계기가 됐고, 이후로 한눈팔지 않고 앞만 보며 살게 했다”며 오히려 감사해했다.
신학교 진학은 스승의 공백으로 인한 빚진 심정 때문
이후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제과회사에 잠시 취직했다가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사역하였다. 그후 다시 직장에 다니다 80년도에 합동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옥한흠 목사가 유학 간 후 지도자가 공석으로 남은 성도교회 대학부에 박성수 회장과 함께 공백을 메우며 엘더와 스태프로서 사역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두 실업자가 성도교회 대학부를 섬기게 됐다”며 “그 이유는 후배들에게 대한 짐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년간 지붕 역할을 하며 자신들을 지도했던 옥 목사의 공백을 자신들이 후배들을 위해 감당해야 한다는 부채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래도 그러한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고, 청년사역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반면, 같은 시기 어려움을 나눈 박성수 회장은 이대 앞에 잉글랜드라는 옷가게를 차리고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누군가 성도교회 대학부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형제들은 군대가고 없고 둘다 대학부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신학교를 다니며 충정교회 대학부 전도사로서 사역하게 됐고, 82년 말까지 사역하고 결혼도 하게 됐다. 이후 84년에는 미국 리폼드신학교에 유학을 갔다. 캠퍼스 사역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 그는 당시 이성문제에 조심하는 편이었고, 대학부에 이어 청년부를 섬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신학교에 진학하고 캠퍼스 사역자로 후배 4명을 지도했는데, 그중 한 명이 지금의 아내였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신학교에 진학해 앞길이 보장 안 됐던 자신과 함께 신앙적으로 모험을 할 수 있는 순수한 면이 보기 좋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됐다고 귀뜀했다.
사랑의교회 청년사역과 이랜드사역 병행하며 고민
87년 9월 졸업을 4개월 앞둔 시점에서 그는 당시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교회건축까지 마친 상태였던 옥한흠 목사로부터 젊은이선교를 맡아보지 않겠냐는 편지를 받고, 사랑의교회 청년부와 젊은이선교를 담당하게 됐다. 그는 자신에게 젊은이선교를 맡긴 이유가 대학원에서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 공부한 점을 눈여겨보신 거 같다고 했다. 당시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고민이 청년들의 갈등을 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셨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교회에서의 젊은이사역은 전설적인 존재로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 특유의 유머와 날카로운 지성, 그리고 사회적 고민을 외면하지 않던 그의 사역에 많은 청년들이 따랐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던 시대였다. 그는 청년부를 지도하며 대통령선거 감시단을 꾸려 청년들과 함께 공명선거운동도 펼쳐 나름대로 교회의 사회참여 역할을 위해 노력했다.
신나게 젊은이사역을 하던 92년 3월 그는 박성수 회장으로부터 이랜드 부사장직을 맡아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그런 제안을 옥 목사에게 말했고, 옥 목사 역시 흔쾌히 허락을 해 두 가지 사역을 2년간 병행하다가 후임이 정해지자, 94년 아예 이랜드 부사장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에게는 늘 고민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에서의 사역을 통해 말씀 자체에 빠져 사는 재미는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혼란한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보호하심이 있었던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나라의 아픔과 혼란을 놓고 뜨겁게 기도하지는 못하고 그저 전도할 생각만 했던 거 같아 죄송스러웠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이랜드 박성수 회장으로부터의 제안은 신앙인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당시 이랜드는 초고속으로 성장해 주목받던 때였고, 기독교기업이 세상 속에서 뭔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는 “현재도 너무 좋지만, 사랑의교회에서 6년 청년 사역한 것과 이랜드에서 4년간 일한 것이 나의 인생 중 골든타임으로, 좋은 친구와 지도자를 만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랜드 통해 정직한 경영 등 사회적 영향력 과시
원래부터 청년사역을 하며 조직운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랜드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주로 부사장으로서 대외업무와 조직관리를 맡았던 그는 당시 이랜드에 주축을 이뤘던 20, 30대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즐겁게 리드하며 회사성장에 기여했다. 국제화팀, 물류팀, 홍보팀, 노무관리팀 등 주로 얼굴마담 역할을 많이 했다는 그는 정직한 경영을 통해서도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러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는데, 그 이유는 마음을 만나야 사람이 바뀌는데, 경쟁적 구조가 생리인 직장 안에서는 마음을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교회보다는 준비된 일꾼들을 활용해 앞선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사람을 준비시켜 배출하는 곳은 교회였고 그런 사역이 그리웠다. 또 주일날 설교 사역에 대한 목마름도 있었다. 박 전도사는 다시 사람을 세우고 남기고 싶은 생각에 97년 라이브교회를 당산동 이천일 아울렛 7층 소극장에 세웠다. 그리고 1년간 이랜드 일과 교회 사역을 병행하다가 아예 98년 교회사역에 전념했다. 돈버는 것보다 쓰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며 웃는 그는 자신이 회사를 나올 즈음에는 젊었던 경영진이 많이 커 있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나온 거 같아 홀가분했다고 한다.
라이브교회 개척한 후, 가정교회로 진행 중
처음에는 옛날 제자들을 중심으로 60명이 모였는데, 지금은 어른 50명, 아이 50명이 모이고 있다. 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던 것에 착안하고 ‘살아 있는 교회가 되자’라는 의미로 ‘라이브교회’라고 이름 지었다는 그는 친밀한 신앙 공동체와 말씀준비, 같이 삶을 나누고 기도하며 염려하는 사역을 다시 하게 되어 기뻤다. 9년간 교회사역이 숫자로 따지면 부진했지만, 자신은 오히려 좋단다. ‘한 몸의 지체로 살아간다’는 느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주일날 드려야 하는 예배라는 공적인 끈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친숙한 삶이 풍성히 나눠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주일예배도 동그랗게 앉아 자유롭게 생활과 관련된 설교를 하며 자유롭게 드리고,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도 하고, 식사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며, 찬양과 축하가 어우러진 파티도 연다. 평일에는 4년 전부터 가정교회로 모이는데, 휴스턴 한인교회 최영기 목사가 지은 『구역예배를 가정교회로 바꿔라』는 책을 읽고 관심을 가지게 됐다.
지금은 좀더 가정교회의 틀이 잡혀가고 있는데, 주일날 집회보다 가정교회 안에서 더 풍성한 영향력을 교인들이 주고받고 있다. 가원이 20명이 넘으면 공동체의 친밀성이 흩어지기에 20명을 분리기준으로 하여, 5개의 가정교회를 두고 있다. 친밀한 공동체를 통한 살아 있는 예배를 지향하는 그의 바람이 가정교회 안에서 지금도 실험을 계속하게 만든다. 이러한 실험을 위해 교인들은 국제제자훈련원에서 나온 볼프강 짐존의 『가정교회』를 필독서로 읽고 있다.
목사안수 안 받고, 전도사를 고집하는 이유
다시 교회사역을 시작한 그에게 ‘왜 아직까지 목사안수를 안 받냐’고 물었다. 그는 “옥 목사님은 제 인생에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해주셨고, 청년들을 돕고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도전했다”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전통목회보다는 청년사역을 하라고 하신 것 같기에 목사가 꼭 될 필요를 못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목사안수를 안 받는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 입장에서 사역에 있어 목사보다는 전도사가 자유스럽고, 사역의 장애를 덜 느끼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아직까지 평신도와 목회자의 갭이 한국 교회 안에서는 큰 것 같아, 자신은 그 중간 정도의 위치에서 사역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풀었다.
신학훈련을 받았지만 평신도와 비슷한 입장에서, 그렇다고 완전히 평신도이냐 하면 그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 영역에서 ‘신앙의 현장화’를 실천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목회자로서 부르심이 있었다면, 일반 목회와는 특별하게 다른 부르심이었다고는 생각 안 한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의 시대는 목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며, 평신도들이 말씀으로 무장되고 삶으로 영향력을 미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목사는 세상 속에서 싸울 평신도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며 도전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구체적인 적용은 평신도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목사는 급속히 변하는 세상에 대한 감이 늘 떨어져서는 안 되며, 이점에 있어서 그는 아직 현장에서 목사보다는 자유로운 신분인 전도사로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기에 목사안수를 안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극장운영, 탈북자선교, 대안학교 등 계속된 도전
그는 현재 주일에는 라이브교회 담임전도사지만, 평일에는 소극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이다. 당산동 이천일 아울렛 7층의 소극장이 주일에는 예배당인데, 평일에는 놀리던 공간을 98년 어느 날 아동극 하던 사람이 빌려달라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좋은 작품을 선정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극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정직하게 세금내기나 수고한 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 등을 이 안에서 실천하고 있다.
이 교회에는 탈북자들도 있는데, 그는 북한선교에도 비전이 있다. 그는 “목회자가 목회하는 재미 자체로 살았으면 하는데,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부자가 된 것 같다. 목회 자체보다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고, 부자가 더 큰 부자를 만나면 힘들어하듯 더 큰 성취를 한듯한 사람을 만나면 힘들어 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도 물질로 돕는 것에만 만족하는데, 그보다는 같이 지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금은 내지만, 내 옆집에 흑인이 이사 오는 것은 불편해하는 미국의 중산층교회 교인처럼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라이브교회는 탈북자들에게 돈이나 옷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평범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집에 놀러가고 어우러지며 한 식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은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언제나 편하게 달려가 만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옥한흠 목사의 모습에서 연유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다음세대에 대한 짐을 많이 느끼고 대안학교의 비전을 갖고 있다. 지역사회를 섬기는데도, 그리스도의 사람을 세우는데도 학교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건강한 크리스천을 만들어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데 그곳에 예수 믿는 가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면, 세상이 교회에 대해 다른 눈길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날 TV 채널을 바꾸듯이 다 큰 성인을 헌신된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어릴 적부터 건강한 크리스천을 키워내고 차곡차곡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학교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삶이 바뀌면 예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무게 실린 헌신을 하는 크리스천들이 나오지 않을까 자못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는 라이브교회의 제1 목표를 내용있는 신앙생활, 향기가 전달되고 맛보는 성장에 두고 있다. 50대에도 많은 꿈과 모험을 아직도 시도 중인 그는 “내가 받은 은혜가 큰데, 그 은혜가 헛되지 않게 늘 새롭게 변신하도록 긴장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고 사는 게 두렵고, 새로운 길을 걷는 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분이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도전하는 하루를 산다.
<우은진 기자>
학력
연세대 식품공학과 졸업
합동신학대학원 졸업
리폼드신학대학원 졸업
경력
충정교회 대학부 전도사
사랑의교회 젊은이선교담당 전도사
이랜드 부사장
현 라이브교회 담임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