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행전

2006년 01월

삶의 모범을 보이신 스승을 보며 믿음을 지켜 나갑니다 - 김병재 변호사

전도행전 우은진 기자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의 변화된 삶.’ 이 말은 많은 신앙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목표이다. 그러나 그 말대로 산다는 것은 솔직히 쉽지 않다. 나를 중심에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나 중심의 사고가 정말 버려졌는지는 타인의 이런저런 평가보다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예수님 중심’, ‘변화된 삶’이라는 말조차 듣기 힘든 시대에 옥한흠 목사로부터 이런 삶을 지향하는 제자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큰 축복을 받은 이들 중에는 국내 4대 로펌 중 하나인 법무법인 ‘광장’의 대표 김병재 변호사도 있었다. 그는 첫인상에서부터 온유와 겸손함이 잔잔하게 풍겨 나왔다. 인터뷰가 무르익어갈 즈음에는 제자훈련 받은 사람으로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톤으로 자기주장을 피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그 자신부터 지속적인 신앙훈련을 통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김병재 변호사, 그를 제자리포트의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초대했다. 

 

친구 인도로 온 성도교회 대학부 생활에 푹 빠지다
법조계에서 그의 화려한 이력은 늘 상승곡선이었다. 사시 17회 출신인 그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동기생 그룹으로 주목받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대 법무법인의 대표이다. 그런 그가 아직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영성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성도교회 대학부 시절 만난 신앙의 스승과 친구들, 그리고 제자훈련이다.
그는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비기독교 집안이었다. 외가 쪽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결혼 후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 삶이란 먹고 놀고 잠자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었고, 자신은 언제나 어린아이에 불과하며, 세상은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상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끔 외할머니가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라는 말을 할 때는 예수가 누구인지, 천당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만 여겨졌다. 다만 성탄절이나 부활절에는 공책과 연필을 받으러 교회에 꼭 가곤 했다.
그런 그가 공부벌레들이 모여든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이사왔다. 갑자기 환경이 달라졌기에 모든 게 생소했다. 두리번 거리던 차에 어느 날 서글서글하면서 부담 없는 한 친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 다니는 교회가 없으면, 이번 일요일에 우리 교회에 함께 가지 않을래?’ 하고 물은 것이다. 그 친구가 바로 성도교회에 다니던 방선기 목사였다. 이때부터 성도교회 고등부에 다니며, 토요일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과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고, 궁금한 게 많았다.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할 즈음 성도교회 안에 대학부가 새롭게 조직되고, 그 책임자로 옥한흠 목사가 부임해 오면서 제자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합세한 그는 옥 목사의 영적 지도 아래 하루 종일 제자훈련 받는 맛에 푹 빠졌는데, 그에게는 본격적인 신앙훈련이었다. 그때 옥 목사는 구원이 왜 필요하고, 예수님은 누구인지 대화를 통해 의문점을 직접 풀어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말씀과 삶이 어우러진 대학부, 젊은 영혼들을 붙들다
대학부 전체 모임과 학년별 모임, 반별 소그룹 모임 등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 그는 대학부 분위기가 마치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았다고 증거한다. 말씀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스승과 제자, 형제와 자매 사이의 사랑이 젊은 영혼들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스승인 옥한흠 목사는 칠판에다 말씀의 요지를 조목조목 적어가며 가르쳤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주제별로 뽑아서 기록한 암기용 카드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이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 속에서나 걸어 다니면서 암기했고, 그 말씀들을 삶에 적용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삶의 적용 시 성공담과 실패담을 옥 목사는 물론, 선후배들과 같이 나누며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거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교회 마당 옆에 있는 두 칸밖에 되지 않는 옥 목사의 사택으로 쳐들어가 밤을 지새워가며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각자의 은사에 따른 꿈과 비전을 키워갔다. 추운 겨울밤 빙 둘러 앉아 담요 속에 발을 넣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출출해질 때면, 당시 어려운 살림에 옥한흠 목사의 사모가 끓여주던 라면을 먹으며 행복해했다고 미소를 띠운다. 
1972년 여름에는 밤나무가 우거진 한적한 시골에서 제자훈련 여름수련회를 갖기도 했다. 옥 목사가 그때 왼쪽 벽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고 적었다. 또 오른쪽 벽에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는 말씀을 적고 설교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의 말씀들이 그에게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 생명의 말씀들이었다.
같은 해 겨울에도 변두리 수양관에서 수련회를 열었는데, 당시 옥한흠 목사가 선포한 말씀이 참석한 모든 청년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며 깊은 회개의 눈물을 펑펑 흘리는 ‘눈물의 수련회’가 되었다. 당시 대학생성경읽기회나 네비게이토선교회, CCC 등 교회 밖에서의 신앙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나, 교회 안에서의 이같은 신앙운동은 거의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김 변호사는 “당시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독재정권에 머리를 조아려 부귀영화나 권력의 부스러기를 얻으려는 부류가 아니면, 늙고 힘없는 사회의 패잔병들을 한군데 모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부르짖으며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부류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자훈련을 받고 각자의 은사에 따른 꿈과 비전을 기른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옥한흠 목사의 식견은 선구자적이었다고 김 변호사는 평했다. 

 

3M 소명 받고, 법조영역에서 제자로 살 것을 다짐하다
옥한흠 목사로부터 제자훈련을 받은 김 변호사는 비로소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경험을 했으며,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서 3M 비전 (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ssion)을 강조했는데, 그에 따라 김 변호사 역시 대학부 생활 때는 캠퍼스선교 사역에 도전받아 학교 선후배들에게 성경말씀을 이야기 해주거나 성경말씀을 적은 편지나 카드 등을 열심히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성도교회 대학부 모임에 데려오거나 수련회에 데려오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았다. 대학부를 마칠 즈음에는 ‘믿음은 감정보다는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영리 책자의 설명대로, 그의 신앙의 뼈대는 튼튼해 졌다.
스승으로부터 은사를 통한 제자로서의 삶을 도전받은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열심히 공부했다. 옥 목사는 김 변호사의 법조인으로서의 비전을 듣고서는 “각자 받은 은사대로 사는 게 작은 예수로 서는 지름길이다”며 그를 적극 후원했다. 가끔씩 공부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교회행사나 모임에 못 가는 게 아쉬웠고 고민이 됐다. 그때마다 옥 목사는 그에게 법조인과 신앙인으로서 조화를 이뤄가는 방법과 신앙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면서 사회에서 작은 예수로 사는 방향을 가르쳐줬다. 
법을 공부한다는 게 자기와의 싸움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학교 도서관, 고시촌, 심지어 조용한 사찰에 들어가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기도와 성경묵상과 찬양을 드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 고비마다 제자훈련 때 잡힌 신앙의 기초 덕을 톡톡히 봤다. 당시 대학가의 상황이 정의감에 불타 데모하는 운동권으로 휩쓸리기 쉬웠는데, 옥 목사가 모든 면에서 잘 인도해주어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1975년 사시 17회로 합격했다. 그 후 2년간 사법연수원에서의 수습과 군법무관 생활 3년을 끝내고,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서 옥 목사가 준 두 번째 비전 ‘비지니스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해 사영리를 비롯한 신앙소책자를 동기생들의 자리에 놓아 그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때의 동기생들이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 정상명 검찰총장, 전효숙, 조대현 헌법재판관, 안상수, 진영 국회의원 그 외 안대희, 이종백 등의 전·현직 검사장, 고등부장판사, 대표변호사 등 여럿이 있다.
그는 그때 뿌린 씨앗이 그들 마음속에 자라나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지난해 5월에는 동기생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서 저녁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해 모두 머리 숙여 기도했는데, 평화와 기쁨이 그 자리에 넘쳐 흘렀다고 한다.


법조영역에서 쉽지 않은 제자의 삶, 전직을 하게 되다
그러나 법조영역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다짐은 쉽지만은 않았다.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상승곡선을 그린 평탄한 삶이었지만, 많은 번민과 갈등이 그의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법관으로서 일을 할 때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라”(신 1:17)고 하신 말씀을 따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지혜와 구원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재판을 하기 위해 법정 문을 들어설 때마다 잠시 서서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했다.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고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판결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 옥한흠 목사가 그의 판사실까지 찾아와서 기도해주곤 했다. 그는 옥 목사의 기도를 통해 지혜와 영적 깨달음을 얻었으며, 큰 사랑과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특히 원효로 윤 노파 일가 3명의 피살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쓴 며느리의 억울함을 밝혔던 82년 판결 등은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용을 베풀었던 판결들은 법관으로서 소명을 실천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그는 법관으로서 아무리 공의로운 재판을 할지라도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소외계층에 속하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호대책도 없는 판결을 선고하는 것만으로는 법조영역에서 작은 예수로서 살아가는 소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좀더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작은 예수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내면의 요구가 점점 강해졌던 것이다.
급기야 그는 1990년 가을 40세에 잘 나가던 법관직을 사직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당시 선후배 동료들은 물론 주변에서 왜 좋은 그 법관직을 그만 두냐며 그의 사직을 적극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직의 솔직한 이유를 딱 부러지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신앙적 회심이 이유였는데, 그것을 신앙이 없는 동료들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법관복을 벗자 그는 그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법관직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느꼈다. 오히려 사직 이후 영적인 자유함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고, 대학부 시절 받은 비전을 실천할 기회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변호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법관으로서 억누르며 살았던 규율로부터 해방감을 느끼는 한편, 억울한 사람, 죄와 허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변호해 주며, 작은 예수로서의 삶을 경험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제자의 삶 경험하며, 신나게 변호사 생활하다
버림받은 아픔을 견디지 못해 어린 자식들과 함께 동반자살을 꾀하다 혼자 살아남아 무기징역 받은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 일은 법이 정의만 실현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보여준 사례라 보람이 컸다. 또 교활한 올무에 빠져 꼼짝없이 누명을 쓰게 된 기업가의 진실을 벗겨준 일이나 IMF때 희생양으로 구속된 관료들을 풀려나게 한 일 등등 법관으로서 있을 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게 돼 기뻤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매월 한 번씩 대법원에서 법조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기독법조인 조찬기도회인 ‘애중회’에 열심이다. 또 법을 통한 선교, 법률상담을 통한 전인격적 치유, 법 실천을 통한 정의사회 구현 등을 비전으로 사랑의교회 법조선교회를 1996년 창립하여 활동해 오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법조계가 국민적 신뢰를 못 얻고 있는 점을 기독법조인 자신부터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세로 예수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지금 그는 변호사만 170여 명, 변리사 40여 명, 공인회계사를 비롯한 각 분야 전문가들과 직원들을 합쳐 600여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국내 최대 규모의 법무법인 광장의 대표로서 더 큰 일을 세상 속에서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중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매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기쁘게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떤 상황이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감사와 친절, 용서와 정직,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려고 애쓴다. 더불어 자신이 가진 재능과 개인적인 사명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껏 사용하고 싶어 했다.
최근에는 형제적 사랑의 훈련에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꾸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육체적, 영적 봉사의 일들을 실제로 행하는 실천적 사역에 큰 관심이 생겼다. 현재 그는 다일공동체 이사로서 조금이나마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에 조력하고 있다.
그리고 바쁜 직장일 때문에 교회활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는 대신 교회 내 영성훈련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미 다일교회 영성훈련 3단계 중 리더훈련까지 마친 그는 제자훈련 이후 끊임없는 자기 훈련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교회 내 영적으로 갈급한 평신도들을 위한 영성훈련 사역에 쓰임 받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이제는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의 변화된 삶’을 따르고 있는 그는 ‘내가 한다’라는 생각은 힘든 일을 더 힘들게 하지만, ‘내 안의 예수님이 하신다’는 생각으로 맡기기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한다. 이미 제자로서의 비결을 터득한 그는 “그 비결은 이제까지 삶과 신앙의 스승으로서 직접 본을 보이신 옥한흠 목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며 “옥한흠 목사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그런 스승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자신도 믿음을 따라 살아가고 있노라고 말이다.  

 

 


김병재 변호사

_ 법무법인 ‘광장’ 대표

_ 서울대 법대 졸업
_ 사시 17회 합격
_ 각급 법원 판사
_ 법무법인 광장 대표 변호사
_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_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 위원
_ 중앙일보사 법률자문위원
_ 사랑의교회 법조선교회
_ 다일복지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