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최종률 장로 _ 동숭교회
올해도 성탄 절기는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무리 정치 상황이 혼미하고 경제 사정이 어렵고 사회가 어수선하다 해도 성탄절은 여전히 설렘과 행복감을 동반한 채 우리의 영성과 감성을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성탄절과 관련된 추억 몇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성탄극 <빈 방 있습니까>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올해로 25년째이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관객들을 맞아온 <빈 방 있습니까>와 성탄절, 가족에 관한 추억들을 회상하다 보면 어느 새 행복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녀와의 사랑이 무르익게 된 것도 성탄 절기의 <빈 방 있습니까> 공연과 맞닿아 있다. 서구적 이미지의 늘씬한 여인을 만나게 된 서른여덟의 연극쟁이 노총각은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연습과 공연 스케줄 때문에 데이트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그해에는 지방 순회공연이 많았는데, 그건 공연과 연애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오묘하신 하나님, 차창 밖의 설경과 밀어들, 그리고 공연의 감동이 분위기를 무르익게 했다.
4, 5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틈에 유난히 어두운 표정을 한 중년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몇 분 간격으로 터지는 관객들의 폭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감각하게 앉아 있던 그 아주머니는 연극 종반 “빈 방이 없다”고 말해야 될 장면에서 “방이 있다”며 요셉과 마리아를 붙잡는 바람에 극중극을 망쳐버린 주인공 덕구의 독백을 들으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극단으로 날아온 그 아주머니의 엽서를 통해 사연을 알게 되었다. 사랑 없는 부부관계와 극도의 상실감에서 이혼을 결심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별 생각 없이 극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땐 남편이 미워서 정죄하기만 했어요. 그리고 성격 차이 때문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죠. 그러나 그 연극을 보고 나서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었는지 깨닫게 됐어요. 남편한테 먼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했죠. 그리고 우리 가족은 치유됐습니다.”
오묘하신 하나님은 그 아주머니를 극장으로 인도하셨고, 성탄극 <빈 방 있습니까>를 가정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최근 군에 입대한 아들 녀석으로부터 훈련소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받았다. 딸아이와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고 있는데, 동생의 짧게 깎은 머리와 군복 입은 모습에 깔깔대던 딸아이가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말했다.
“군복 입은 거 보니 가슴 아프다. 추워졌는데 얼마나 고생할까….” 가족애를 절감하며 덩달아 가슴이 찡해져 있는데 뒤늦게 합류한 아내가 모니터를 잠시 보더니 슬며시 나가버렸다. 틀림없이 주방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을 터이다.
해마다 맞은 성탄절이지만 올해는 가족을 더욱 느끼게 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예수님은 우리를 성가족(聖家族)으로 만들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았나 싶다. 하여, 성탄은 사랑의 절기인 것이다.
최종률 장로는 동숭교회를 섬기고 있고, 연극·뮤지컬 연출가, 한동대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연출 대표작으로 <빈 방 있습니까>, <낮은 데로 임하소서>, <오 마이 갓스>, <The King>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