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전성민 교수 _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1989년 성탄절 전날, 내가 출석하던 교회에선 ‘도시빈민을 위한 성탄예배’에 함께 참여했다. 당시 대학 1학년이던 나도 이 예배에 참석했다.
비닐하우스촌 어귀에서 예배를 드린 후, 그 비닐하우스들 사이의 작은 통로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쓰는 건지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가재도구들이 그 통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탄의 신비가, 내 눈 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날
성탄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뻐하는 날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탄생을 묘사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말씀이 몸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 정도가 된다.
여기 쓰인 “장막을 치다”라는 표현은 구약에 나오는 성막과 관련된 동사이다. 성막은 후에 성전이 된다. 그런데 첫 번째 성탄절이 지나며, 더 이상 땅의 건축물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게 되었다. 대신 예수님이 성전이었고, 이제는 그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성전이다.
성탄절과 오순절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땅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움직이는 공동체에 성령으로 임하시게 된 것이다. 사실 솔로몬도 결코 땅의 건물에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기껏 성전을 다 지어놓고 그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왕상 8:27).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베들레헴 마구간에 있던 동물들의 밥그릇에 임마누엘이 되어 내려오셨다.
자기를 비우신 예수님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적 탄생을 자기를 비우셨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한다(빌 2:5~7). 그런데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기를 비우다 보면, 이러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비움의 삶을 살면 우리가 가진 꿈들을 다 잃어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꺼내 읽는 동화책이 있다. 신학생 시절 성탄절에 방문했던 한 친구의 집 거실 탁자에 놓여있던 책에서 읽은 동화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가 되었다. 엔젤라 엘웰 헌트의 『세 나무의 꿈』(꿈을이루는사람들)이라는 동화의 스토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 나무 이야기
옛날 산꼭대기에 있던 작은 나무 세 그루가 장차 크게 자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번째 나무는 보석을 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 상자가 되고 싶었고, 두 번째 나무는 왕들을 태우는 튼튼한 배가 되고 싶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언덕을 떠나지 않고 가장 큰 나무가 되어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나무들은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명의 나무꾼들이 이 나무들을 베었다. 첫 두 나무들은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지만 언덕에 남고 싶었던 세 번째 나무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첫 번째 나무는 보물 상자가 아니라 동물들의 밥그릇이 되어, 보석 대신 건초가 가득 채워졌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아니라 작고 약한 평범한 고기배가 되어, 왕들이 아니라 매일 냄새나는 죽은 고기들을 싣고 다녔다. 세 번째 나무는 그냥 튼튼한 기둥들이 되어 제재소 마당에 내버려졌다. 시간은 흘러 세 나무들은 자신의 꿈들을 거의 다 잊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 여인이 갓난아이를 동물들의 밥그릇에 내려놓았을 때, 첫 번째 나무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두 번째 나무는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 피곤한 여행자와 그의 친구들을 싣고 요동치는 호수 가운데 있었다. 곧 부서질 것 같았지만 그 피곤한 남자가 깨어나 폭풍을 잠잠하게 했을 때, 두 번째 나무는 자신이 하늘과 땅의 왕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금요일 아침, 세 번째 나무는 목재 더미에서 꺼내져 소리지르는 군중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침내 군인들이 어떤 남자의 손을 자신에게 못 박았다. 자신이 너무나 추하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세 번째 나무는 하나님의 사랑이 첫 번째 나무를 아름답게 만드셨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 번째 나무를 강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세 번째 나무를 볼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었다.
자기를 비우는 자에게 주시는 부활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은 무엇보다 우리의 허영을 꾸짖는다. 그래서 성육신과 부활의 비밀을 말하는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무든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권한다. 더 세련되고, 더 강하고, 더 크고자 하는 마음은 주님의 성육신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속에 감추인 성육신과 부활의 비밀을 믿고 자신을 비울 때, 사람에게 자랑할 꿈은 깨져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빛나는 참된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번 성탄절에는 어디서 어떻게 찬송해야 이 연약한 아기로 오신,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 부끄럽지 않을 찬송이 될지 생각이 많아지는 2009년의 마지막 달이다.
전성민 교수는 서울대 수학과(B.Sc.)와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M.C.S., Th.M.),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D.Phil.)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 동백지구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