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010년 11월

서가에서ㅣ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손봉호 장로

서평 박시온 기자

좋은 책은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어야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시민운동가, 손봉호 교수. 이 외에도 그를 정의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그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즐거운 독서를 하고 있는 손봉호 교수, 그를 만든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교수님께 영향을 주었던 책은 어떤 책입니까? 신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변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은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입니다. 소위 실천주의라는 것이 확대되어 있을 때인데, 기독교 신앙과 실존주의를 연결시켜놓은 그 책에 제가 빨려 들어갔다고 할까요. 성경 속 믿음의 용사와 문학작품 속 비극의 주인공을 비교한 내용이 상당히 인상 깊었고, 철학을 공부하는 데 상당한 자극이 됐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며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많지만, 두 가지 책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째는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입니다. 제가 시민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은 무엇인가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서양 철학 전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비판합니다. 기존 서양 철학이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관리하겠다는 독재적인 철학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이를 제국주의라고 표현합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사람의 얼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더 기본적인 철학의 문제가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성경적인 요소가 그 가운데 들어가 있죠. 그래서 이러한 내용이 저에게 굉장히 호소력 있게 다가왔고, 저로 하여금 철학과 과학, 서양 학문 전체를 다르게 보는 관점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러한 책들을 어떻게 만났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니버와 레비나스의 책 모두 박사 과정에서 필독서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재밌는 것은 두 책 모두 교수님들이 소개해준 것이 아니고, 제가 교수님들께 이 책을 읽으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했던 책들입니다. 좋은 책들을 선정해서 읽는 데 저에게 도움이 된 것은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한 독서 토론이었습니다. 독서클럽 안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고, 신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의 경우 한 친구가 소문을 듣고 알려줬는데, 그때 당시 불어로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 번역본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저는 그 책을 빨리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불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불어는 대학교 때 조금 공부한 것이 다였는데, 안 그래도 소화하기 어려운 내용을 불어로 읽어야 해서 책을 읽다가 위궤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독서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깊이 있는 독서를 원한다면, 책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시시한 책 10권 읽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가치 있는 책 1권을 읽는 게 더 낫습니다. 서평, 서문을 찾아서 읽어보기도 하고,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하면서 심각하고 진지하게 책을 골라야 합니다. 가치 있는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또 다른 독서 원칙이 있습니까? 좋은 책을 빨리빨리 읽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권을 떼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 다 읽었다!’라는 형식적인 만족감은 실제론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책을 읽다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중간에 내려놔도 괜찮고, 건너뛰어도 괜찮습니다.
독서를 할 때는 빨리 읽는 것보다 중요한 부분을 반추해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나오면 더 이상 읽어 내려가지 않습니다. 일단 덮어놓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이 부분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내 것으로 만들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이 들면, 책을 덮어두고 왔다갔다 걸어다닙니다. 그 부분을 생각하면서 말이죠. 책을 천천히 소화시켜가면서 읽는 것입니다. 저는 좋은 책에서든 성경 말씀에서든, 순간의 깨달음은 별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오래 묵상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또한 책을 같이 읽으며 토론을 하면 참 도움이 됩니다. 토론을 할 때, 주제 자체가 심오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제가 심오하지 않아도 토론하다 보면 심오한 것이 나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런 독서 토론회가 많은데, 한국에 이러한 문화가 발달이 안 되어서 안타깝습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독서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향을 받는 것이 여러 가지 많지만, 우리의 인격과 가치관, 그리고 삶 전체가 많은 부분 책의 영향을 받는 것 아닙니까? 좋은 저자는 책을 적당히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자가 그렇게 고심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쓴 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가치 있다고 증명된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큰 복입니다. 저자들이 오랫동안 고생해서 정리해놓은 생각, 경험을 앉아서 책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큰 복, 큰 혜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저자에게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제자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는 데 있어 특별히 영향을 받은 책이 있습니까? 특별히 어떤 책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성경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제자 삼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선교 사명입니다. 학생과 제자는 다릅니다. 제 강의를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면 학생이 되는 것이고, 저를 본받으려고 애를 쓰면 제자가 되는 것이죠. 저는 학생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10년, 20년 후에 나를 기억할 때 ‘그 선생님에게 많이 배웠다’라고 느낀다면 너희는 실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었네’라고 생각해야 성공한 것이다.” 제자들이 저보다 더 나아야죠. 일생동안 스승을 존경하고 흠모하기만 하는 데 그치는 것은 제자로서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관심 있게 읽고 계신 분야는 무엇입니까? 지난 몇 개월 동안 저는 소설을 잔뜩 읽었습니다. 아들이 <뉴욕 타임스>에 실린 베스트셀러 소설책들을 잔뜩 사와서 저도 그 책들을 같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소설 읽는 것에 흥미가 붙어서 예전에 사놓고 읽지도 않았던 소설책들까지 끄집어내서 읽었습니다.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소설들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잭 런던의 『바다늑대』, 그래함 그린의 『The Comedians』입니다. 모두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들이죠. 지금 읽고 있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의 모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재미있습니다. 요즘엔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도 많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가만히 앉아서 생각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이동하다 보면 무료하고 지루하잖아요? 기차나 지하철 안에서 철학책이나 다른 어려운 책들을 읽긴 힘드니까 소설책을 읽고 있어요. 제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 앉은 사람들이 “그게 눈에 보입니까?”라고 물으면서 굉장히 신기해하는데, 그러면 저는 책이 재밌어서 잘 보인다고 대답합니다.

 

추천하고 싶은 책은 무엇입니까? 최근에 읽은 책 중 상당히 중요하다고 느낀 책은 정치철학자인 Judith N. Shklar의 책입니다. 1992년도에 출판된 『The Faces of Injustice』인데, 사회윤리, 정치윤리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는 운이 나빠’라고 생각하는 것, 운을 운운하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수 없잖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전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오는 것이고, 그 뒤에 인간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고 이 책은 설명합니다. 얇은 책이지만, 역사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인간의 잘못과 욕망에 대해 예리하게 잘 분석해놨습니다.
<박시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