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저널

2013년 10월

추수를 위한 기도

해외저널 제임스 M. 윌리엄스

<Discipleship Journal> 2005년 7/8월호

 

몇 년 전 니카라과에서 진정한 기도자를 만난 적이 있다. 매주 월요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매였다. 그녀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때면 유독 길게 기도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 칼로스였다. 그는 니카라과의 혁명운동가 중 한 명이었고, 수차례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그 일을 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칼로스가 한 대학가에서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을 때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 자리를 피하지 못했던 그는 성급히 유인물을 자신의 옷 안으로 구겨 넣었다. 경찰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봤고, 칼로스는 곧바로 몸수색을 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칼로스의 셔츠를 들췄을 때, 유인물은 온데간데없었다. 칼로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비밀본부에 들이닥쳐 인정사정없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칼로스의 많은 동료들은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경찰이 칼로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자, 그 총이 고장이 났다. 그때 칼로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쫓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칼로스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건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됐다. 칼로스는 나와 함께 마나과로 가는 차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목회자로 어떻게 부르셨는지 간증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끝에는 한 여성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무릎을 꿇었던 기도가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
교회에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기도”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한다. 다양한 설교와 강의, 책들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말 우리가 칼로스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 기도는 출발한다. 주님은 인간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열망이 나로 기도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 19:10).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내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행 26:18a).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딤전 2:4) 원하신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 중에 그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빌 3:10) 원했다. 그리고 동일한 열정으로 많은 영혼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길 바랐다(고전 9:19).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득 채운 인간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남겨진 끔찍한 결과가(마 25:41, 46) 나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기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모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긍휼의 기도다. 우리는 자신을 배척한 이들을 위해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어느 선교대회에 리베리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와서 대표기도를 했던 적이 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그가 사로잡혔을 때, 그는 “오 주여”라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서서 눈물을 흘리며 몇 분을 그렇게 서 있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긍휼의 기도다.
두 번째는 인내의 기도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쓰인 헬라어 동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끊임없는 기도를 의미한다. 계속해서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한다. 누가복음 11장 5절부터 8절까지 나오는 간청하는 벗에 관한 비유에서는 담대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끈질긴 기도의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32세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 중에 살았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 어머니인 모니카의 기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내 어머니의 심장을 채운 피와 밤낮으로 흘린 눈물이 주님 앞에 나를 위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세 번째는 구체적인 기도다. 성도들에게 전도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에 태신자 카드에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서약하게 하자.
몇 년 전 나는 런던에서 전도 캠페인을 진행 중이던 한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받았다. 예배 중 어느 젊은 여성이 손을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이번 전도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다섯 명의 이름을 기도카드에 적어 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지만, 그들은 모두 거절했습니다. 낙심한 채 전 예배당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제가 기도했던 두 명이 예배당에 들어와 있었고, 또 이 모임이 끝나기 전에 나머지 세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 중에 예수님을 영접한 두 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도자를 위한 기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철저히 성경적이지만 사실 신약에서 전도를 위한 기도의 초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예수님과 바울은 죄인을 위한 기도보다는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강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내 장모님은 수 십 년을 기도로 살아온 분이다. 굉장히 오랫동안 주님께 선교사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장모님의 가족들을 추수꾼으로 보내셨다. 아들과 그 가족 그리고 딸은 인도에서 25년이 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고, 손자는 기독교 영화를 제작하며, 또 다른 손자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나와 내 아내 게일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멕시코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고, 우리가 사역을 처음 시작했던 곳이 멕시코였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추수할 일꾼들을 위해 기도할 때, 믿음을 가져야 할 이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자. 우리는 그들에게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을 수 있고, 너무 멀리 살기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말 특별한 사람을 그들의 삶에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의 취미를 이해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자.
아내와 함께 나는 친척 중 한 명을 놓고, 수년간 기도해 왔다. 그를 위한 기도의 개념이 정리되었을 때, 우리는 이 친척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전도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 낯익은 얼굴의 사나이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는데, 30년 전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내 아내와 나도 기독교인이 됐어. 그런데 우리 집 바로 옆에 누가 사는지 알아?” 알고 보니, 구원받지 못했던 내 친척이 그 옆에 살고 있으며, 그 친구가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친구로부터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전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기회다. 바울은 효과적인 간증을 위한 기회를 간구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우리 집에서 몇 명의 남성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웃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심지어 마약 매매자라고 의심되는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 다음 주간, 나는 우리가 기도했던 모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니카라과에 있었을 때 그곳은 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없었지만, 우리는 물과 식량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성도들과 함께 대통령에게 전도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고, 수개월 후 우리는 기회를 얻었다.
두 번째는 담대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한 전도의 기회를 얻고도 겁을 낼 때가 있다. 교회 전도 세미나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질문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매번 같은 답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스코트랜드의 전도자 이안 리치는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95%의 영국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부담을 전혀 가져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바울이 담대함을 바란 이유가 또 어디에 있을까?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세 번째는 말씀이다. 바울은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하옵소서”라고 부탁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야 한다.
뉴질랜드에서 있었던 전도 캠페인에서 상담센터를 찾아온 남성이 있었다. 그는 나라의 공기업을 개혁해서 이윤 창출을 해야 했고, 또 이를 위해 몇 백 명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야만 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난 그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거듭 질문했다. 그는 거듭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나는 “왜 영접할 수 없는가?”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며, 나는 그런 직분을 가진 사람이 가질 만한 질문들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그와 함께 풀어나갔다. 그 다음날, 그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찾아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저희 남편이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했어요! 남편의 질문들에 다 대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집에서 질문했던 모든 질문에 내가 답해줬다고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네 번째는 명확성이다. 바울은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고 기도를 부탁한다. 몇 년 전 런던 레스터 스퀘어에서 지나가던 길을 멈추고, 복음에 대해 설교하던 이의 설교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의 설교는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명확하지가 않았다. 신학 교육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설교였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명확하게 선포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잃어버린 영혼과 전도자를 위한 기도는 다양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데 효과적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3~5).
기도는 바로 이런 무기 중에 하나다. 견고한 진은 무관심과 이성주의, 물질주의과 거짓 종교 등일 수 있다. 하지만 기도로 이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교회는 부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계 많은 이들이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기도를 시작할 때,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고 구세주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주성현 목사(국제제자훈련원 영어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