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4년 09월

망각의 은사

과월호 보기

“아들 반 학부모 대표로 뽑혀서 7반에 가서 실컷 얘기하고 왔는데 아들이 5반이었어요, 택시에서 잠든 아들을 두고 내렸어요, 핸드백 끈을 안전벨트인 줄 알고 매네요, 꼭 필요한 전화를 했는데 통화음 울리는 동안 누구한테 전화했는지 고민한답니다, 조기를 구웠는데 이상해서 보니 식용유대신 주방세제를 넣은 거예요, 휴대폰을 마우스인 줄 알고 계속 눌렀네요.”
건망증을 주제로 한 방송에 청취자들이 보낸 문자다. 중년여성들이 가장 크게 호응했다. 흔히 경험하는 현상이기에 공감한다는 얘기다. 사실 이 정도 건망증은 웃고 넘어갈 수준이다.
하지만 조금 심각한 건망증이 있다. 은혜를 잊는 것이다. 대신 잘못만 기억한다. 두고두고 기억해서 반복한다.
30주년 결혼기념일이다. 아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남편은 크루즈 여행을 계획했다. 행복한 며칠을 보내고 집에 도착했다. 며칠 뒤, 아내가 감기몸살로 심히 아팠다. 아내가 아픈 줄도 모르는 남편, 자기 밥만 챙겨 먹고 나가더니 전화 한 번 없다. 아내는 온종일 굶었다. 그런데 남편은 오후에 손님 데리고 집에 갈 테니 밥 차려 놓으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밥을 차린 아내. 남편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어깨를 주물렀다.
이후 아내는 한평생 투덜댄다. “아파 죽겠는데 자기 밥만 챙겨 먹고 나가다니 손님까지 데려오고 말이야. 하여튼 당신은 자기밖에 모른다니까.” 남편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이 뭐가 힘들다 그래?” 한평생 시동생들을 거느리며 살아온 아내의 하소연에 던지는 어이없는 말이다.
큰 은혜는 쉽게 망각한다. 서로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공방한다. 작은 불편은 오래 기억한다. 그때 당신이 그랬다며 공격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다.
은혜는 망각하고 불편은 기억하는 것, 그것이 곧 불행이다. 불편은 망각하고 은혜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곧 행복이다. 젊어서 부부는 서로 좋아서 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살고, 서로 버리지 못해 산다. 나이 들어가며 부부는 세월을 회상한다. 그러니 가엾어서 살고, 살아준 것이 고마워서 살고, 안쓰러워 산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지 결정하는 것, 그것은 곧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