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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8월

행복을 주는 생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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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죽었다. 이제 겨우 세 살. 병원에서 감기 치료 받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현관문 앞에서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둔 것이다. 부부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기 석 달!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즈음 서로에 대한 원망이 몰려왔다.
남편은 아내를 비난했다. “찬바람 부는 것 뻔히 알면서 도대체 애는 왜 데리고 나간 거야? 감기만 안 걸렸어도 이런 일 없을 것 아냐! 하여튼 당신은 매사가 이런 식이야!”
아내 또한 남편을 원망했다. “그게 왜 내 탓이야? 좋은 병원이 얼마나 많은데 선배니 뭐니 하면서 굳이 그 병원 가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러는 당신은 평소에 애한테 얼마나 신경 썼어?”
날마다 집안에 악에 받친 소리만 난무했다. 결국 부부는 이혼 직전에 이르렀다.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앞에서 보면 절망, 옆에서 보면 낙망, 뒤에서 보면 사망이다. 출구가 없으니 주변은 온통 캄캄한 암흑천지다. 어떤 소망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애굽의 군대가 그랬다. 극도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담담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바라봤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봤다. 백성들은 죽음을 봤지만, 모세는 구원을 봤다.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세일즈맨이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다. 신발 수출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도착한 두 사람은 기가 막혔다. 모두 맨발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가능성을 조사한 후 본사에 텔렉스를 보냈다.
한 사람이 보낸 내용은 이렇다. “신발 수출 절대 불가능함. 가능성 0%. 전원 맨발임.”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의 내용은 달랐다. “황금시장. 가능성 100%. 전원 맨발임.” 행복한 사람에게는 행복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불행한 사람에게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 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부부에게 생각의 변화가 찾아왔다. 고난과 역경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곤고한 심령으로 만난 하나님의 은혜는 평탄할 때 만난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음의 고랑을 깊이 파니 은혜의 강물도 깊게 흘렀다. 불평이 사라진 자리에 서로를 향한 긍휼이 싹텄다. 함께 통곡하며 둘은 다시 하나로 이어졌다. 둘은 비로소 고백했다. “여보, 고마워. 혼자가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