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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래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말씀에 예언된 그 메시아가 오셨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전히 성전에 가서 기도했고 유대인의 규례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미 성전으로 대표되는 유대교는 그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습니다. 화려하지만 껍데기뿐인 성전과 그 세속의 가치관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참된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정말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려 보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복음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볼 때 무엇을 느끼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걸인이 매일 앉아 있던 장소는 어떤 문 앞이었습니까?(2절) 그 이름대로라면 그 문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2.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원래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들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5~8절)
3. 일어나 뛰는 걸인의 모습을 보고 모든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9~10절)
4. ‘성전’, ‘아름다운 문(美門)’, ‘은과 금’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담긴 이미지는 어떻게 대비됩니까?(요 1:45~46 참조) 진정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5. 어둠 속에 있는 모든 백성을 일깨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무엇의 능력입니까?
6. 세상의 부와 힘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무엇으로 한다고 생각합니까?
7.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님을 어떤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은과 금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은과 금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성전과 그 화려한 문은 구걸하는 장소로 사용될 뿐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또한 걸인이 기대했던 동전 몇 푼은 그가 가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어나 뛰게 했으며, 모든 백성을 일깨워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세상의 부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크심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구걸하는 장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보기에 가장 초라한 이름,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가장 위대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