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메시아)는 다윗 왕조를 재건해 군사를 이끌어 로마와 싸워 이기고 정치적 독립을 이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 놀라운 행적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마 16:14)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 16:16). 그분은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같은 의미의 영적 전쟁을 이끄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쟁은 칼로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에 의해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승리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진격 방향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고, 그 대적은 로마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새 이스라엘의 출범(17장)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듯이(참조 출 24:9~11, 16), 예수님께서도 산에서 제자들에게 영광을 보이심으로써 새 이스라엘을 출범시키셨습니다(17:3).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렸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17:5, 참조 3:17)라는 하나님의 선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자리에서 초막을 짓자는 제안을 하고(17:4), 제자들은 믿음이 작아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합니다(17:19~20). 또 여전히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근심하고(17:23), 예수님께서 성전보다 크심을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17:24~26).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훈련시키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까지 제자들을 훈련시키셔야 했습니다.
새 이스라엘의 질서(18장)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출발하기 전에 율법이 선포됐듯이, 새로운 이스라엘도 예루살렘으로 출정하기 전에 법이 선포됩니다.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라의 주권을 누가 갖고 어떻게 발휘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천국, 곧 새 이스라엘의 질서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18:1).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나라도 구현할 수 없는 천국만의 독특한 질서를 가르치십니다. 바로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의 권세는 ‘어린아이’에게 위임되며, 이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18:3~8). 세상에서는 왕과 권세자들을 위해 수많은 평민들이 희생되곤 했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자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헌신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18:12~14).
다만, 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야 합니다. 신중한 절차를 밟아 죄인의 회개를 유도하되, 만약 끝까지 회개를 거부한다면 그를 천국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18:15~17).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영적 생사여탈권을 교회에 위임하십니다(18:18~2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이런 큰 권능을 부여하시면서 용서를 강조하십니다.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18:22). 교회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와 같습니다. 교회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와 같은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18:23~35).
새 이스라엘의 가치관(19~20장)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은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고 유대 지역으로 들어섭니다. 새 이스라엘은 병을 고치며 세상 가치관에 대항하는 천국의 가치관을 전파하는 영적 전투를 수행합니다(19:1~2).
천국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습니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아내를 쉽게 버리는 일을 정당화하던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며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기에 음행 외에 이혼은 불가하다고 가르치십니다(19:3~9).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시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여성과 아이들을 존중하셨음을 보여 줍니다(19:13~15).
천국은 재물에 대한 가치관도 바꿔 놓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19:23)라는 말씀으로 부정합니다. 더 나아가 천국에서 누릴 영생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19:16),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하십니다(19:26).
물론 천국을 위해 헌신한 자들에게 훨씬 더 큰 보상이 있음은 사실입니다(19:28~29). 그러나 천국에서는 ‘더 많이 일한 사람이 더 많이 받는’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저녁 늦게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같은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 이야기를 통해 천국의 복락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20:1~16).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제자들, 그것도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했던 야고보와 요한마저 이 천국의 가치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20:20~21). 천국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의미하는 것인데, 두 제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는 여리고의 두 맹인처럼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라고 외치는 자입니다(20:29~34). 천국은 ‘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새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복(21~22장)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은 대부분 적의 성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제자와 무리들을 이끌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21:1~11, 참조 슥 9:9). 그리고 역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으로써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일전을 시작하십니다(21:12~17).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화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그 존재 가치를 잃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21:19). 그곳은 더 이상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기도의 권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 곧 교회에 이전됩니다(21:21~22).
예루살렘 정복을 위한 예수님의 무기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21:23),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21:27). 성전의 권위를 기득권으로 삼아 호의호식하던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고, 세리와 창기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하셨다는 선포를 들어야 했습니다(21:31~32).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곧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주인이 맡긴 포도원을 갈취하려는 소작농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21:33~4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전과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망각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배를 불리려 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에 의해 오도된 옛 이스라엘은 결국 천국의 지위를 잃고 맙니다. 원래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인 이스라엘은 그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해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이방인들로 그 혼인잔치, 곧 천국을 채우실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이라고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합당한 자들만이 천국을 이룰 것입니다(22:1~14).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 율법사 등이 예수님께 역공을 펼치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로마에 예속돼 있는 정치 상황을 사용한 공격(22:15~22), 당시 신학 논쟁을 사용한 공격(22:23~33), 율법 지식을 사용한 공격(22:34~40) 등 모두 예수님을 흔드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대화에 의해 그들이 갖고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잘못됐음이 드러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예루살렘 성을 다스리던 모든 세력과 말씀으로 싸워 승리하십니다(22:41~46).
예루살렘 파괴(23장)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신 후, 또한 말씀으로 모세의 자리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끌어내리십니다(23:2~3). 그들은 섬기려는 태도가 전혀 없고, 섬김만 받으려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일곱 번 반복되는 “화 있을진저!”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그들이 그동안 보였던 모든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며,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요, 눈먼 인도자요,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할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되고 말았습니다(23:13~36).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지금껏 예루살렘을 구원하려 수없이 시도했으나 그들이 그것을 원치 않았던 역사를 되새기시며 예루살렘이 결국 파괴될 것을 선언하심으로써 예루살렘 정복을 종결지으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정복은 칼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뤄졌기에 세상에 속한 인간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몸짓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일로 인해 이후 인류 역사가 어떻게 변화됐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