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외부의 공격, 즉 군사적 공격이나 정치적 핍박 등에 의해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충격, 즉 잘못된 교리나 윤리적 부패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수많은 핍박 속에서도 번성했지만 사도들은 결코 안심할 수 없었는데, 이단들과 윤리적 부패 문제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단과 도덕적 방종을 교회 내에서 뿌리 뽑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영적 전투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특히 요한서신과 유다서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동생 사도 유다가 거짓 교리에 맞서 어떻게 영적 전투를 벌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요한1서와 요한2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영지주의의 핵심 교리는, 세상은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 정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로 선명하게 나눠지고, 영과 정신은 좋은 것이어서 구원을 얻지만 육과 물질은 악하기에 영원히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내에도 여러 분파가 있어서 그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분파는 악한 육체를 괴롭혀야 한다며 금욕적으로 살고 고행과 자해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어떤 분파는 영의 죄와 육의 죄를 구분해 구원받을 영의 죄, 즉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의심하는 등의 죄는 피해야 하지만 버려질 육의 죄, 즉 음란, 탐욕 등은 구원과 상관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을 영적 세계에 국한시킴으로써 경건 생활과 일상생활을 분리해 버린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세계에 속한 ‘앎, 깨달음’은 중요하지만 일상세계에 속한 ‘순종, 실천’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사실상 그들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고도의 위선자들이었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 영적 세계로 도망가 버린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
진리는 육체를 가졌다(요일 1:1~2:6)
이런 영지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성육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셨을 수 없다”,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마치 입체 영상과도 같은 영적 현현이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이 말씀은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지셨다고 말합니다(요일 1:1).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영적’ 존재가 아니라 뼈와 살과 피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육신을 갖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강변합니다.
요한은 육의 죄는 짓더라도 영의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궤변에 대한 반박으로 영과 육은 섞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의와 죄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영의 죄를 짓지 않아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고 돌이킴으로써 용서를 받기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요일 1:5~9).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처럼 행하라고 가르칩니다(요일 2:3~6). 요한의 가르침에 의하면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진리는 성육신한 사랑이다(요일 2:7~3:24)
예나 지금이나 이단은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새롭고 신비로운 지식을 추구합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자들 역시 ‘영적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요한은 이를 반박하며 진리는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에 들어 있다고 가르칩니다(요일 2:7~11).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있기에 또 다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요일 2:12~14). 또한 ‘신비로운 차원의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이 세상의 정욕과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요일 2:16~17). 그래서 요한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되새기게 하며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음부터 들은 것’에 머물라고 가르칩니다(요일 3:1~11).
교회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진리란 혼자 영적인 체험을 통해 깨닫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사랑함으로써 체험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죄에 이르렀던 것을 예로 들어 형제 사랑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요일 3:12~15). 그리고 이 사랑은 결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재물을 사용하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요일 3:16~18). 이처럼 요한은, 진리는 신비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형제를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그곳에 있다고 강변합니다.
참된 신비는 사랑이다(요일 4:1~5:3)
사도 요한이 영적 체험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요한은 그것이 올바른 교리와 사도들의 증언에 부합하는지 분별하라고 강조합니다(요일 4:1~6). 그러면서 신비로운 체험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 사랑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참된 신비입니다(요일 4:7~8).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교리에 기초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신비한 연합이 이뤄진다고 말합니다(요일 4:12~16).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신앙을 완성하는 도구입니다(요일 4:17~18).
신앙은 실제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 없는 신비한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분명한 증거 위에 놓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 4:20~21). 주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지킴으로 형제가 연합하는 것이 진정한 신비입니다(요일 5:3).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일 5:4~21)
사도 요한은 요한1서의 결론으로 참믿음은 세상에서 영적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있으면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물과 피와 성령을 언급하는데(요일 5:6~8), 이는 예수님께서 물과 피라는 물리적 세계와 성령이라는 신비적 세계를 하나로 이으셨음을 말합니다. 신앙은 정신세계와 물리세계 모두에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담대히 신앙을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영지주의 이단들처럼 영적 세계로 도망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혹 그 싸움에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지키실 것입니다(요일 5:14~21).
진리를 수호하라(요한2서)
요한2서에는 ‘교회’와 ‘성도’라는 단어 대신 ‘부녀’와 ‘자녀’라는 은어가 사용됩니다(요이 1:1). 이것만 봐도 교회가 상당한 핍박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교회를 향해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요이 1:1~4). 그리고 진리를 수호하는 방법은 바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그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요이 1:5~6). 특히 요한은 요한1서에서와 같이 진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대적으로 영지주의 이단을 언급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요한은 이단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요이 1:10).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사랑해야 할 형제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길은 같은 진리를 믿는 자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교리를 전하며 진리를 무너뜨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 무엇이 진리인지를 담대히 드러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하라(요한3서)
요한3서는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조를 통해 진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사도 요한은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해 사랑으로 보살펴 준 가이오에게 “진리 안에서 행하였다”라고 칭찬합니다(요삼 1:3). 가이오는 직접 불신자들을 전도하거나 말씀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후원했기에 진리 안에 행하고,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한 자로 인정받습니다. 그와는 달리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을 뵙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요삼 1:11). 이처럼 진리 안에서 행하고, 진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에게 복음과 성경 지식을 전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우라(유다서)
유다서 역시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을 대처하기 위한 편지입니다. 유다가 대적한 이단은 영지주의와는 약간 다른 율법 폐기론자들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행하셨으므로 우리는 율법대로 거룩히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며 다른 성도들까지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자기들은 육체를 따라 음란에 빠져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는 사도들을 비방하기까지 하는 철면피들이었습니다.
유다는 구약과 위경의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며 그들은 다른 이들을 비방할 권세가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증명합니다(유 1:5~16). 그리고 성도들에게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울 것을 권면하며 이단이 나타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유 1:17~21). 물론 이단의 미혹에 빠졌다고 해서 긍휼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유 1:22~23), 성도는 단호한 태도로 진리를 위해 싸우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도 여러 이단과 비진리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진리를 위해 힘써 일하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사역을 계속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 위에 서 있기만 한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음을 기억하며 다시 한 번 주의 영광이 교회를 통해 온 땅에 비춰지길 기대하는 2월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