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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셔우드 홀은 한국 땅에서 태어나 한국 이름과 한국말을 쓰면서 우리 한국인들을 위해 큰일을 많이 한 분이다. 훌륭한 선교사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평양 ‘해주 구세병원’에서 원장 겸 내과 의사로 일하면서 매우 수많은 결핵 환자를 진료했다.
당시에는 결핵의 치료 방법이 요즘 같지 않아 환자가 아주 많았고, 전염력 또한 막강해 실로 망국병이라 할만 했다. 특히 환자의 대부분이 청소년이어서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그러나 식민 통치를 하던 조선 총독부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인조차도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크게 걱정한 닥터 홀은 비장한 결심과 각오로 폐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 설립을 계획하고, 미국 감리교 선교부 및 주변의 도움을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운다.
그는 또한 요양소의 운영비도 마련하고 결핵에 대한 계몽을 위해 크리스마스 씰(Seal)을 발행하기로 하고, 1932년 천신만고 끝에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씰을 사는 사람은커녕 그의 의도를 이해해 주는 사람조차 전혀 없어 부득이 교회나 학교를 통해 선전하기로 했다.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광성과 정의학교 기도회 시간을 이용해 씰을 선전하고,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숭실, 숭의학교에도 선전을 했다.
닥터 홀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와 같은 외국에서도 호응이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 곳에 편지와 씰을 발송했다. 이를 방해하려는 일본인들은 타자로 쓴 편지는 인쇄물이니 우표를 더 붙여야 한다는 핑계로 크리스마스가 다 지난 후 발송하기도 하곤 했다. 그러나 닥터 홀은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이 일들을 계속해 나갔다. 한국과 한민족을 위한 닥터 홀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횡포를 부리던 일본인들은 결국 범죄자라는 누명을 씌워 닥터 홀을 추방하고 닥터 홀은 눈물을 흘리며 한국 땅을 떠나 인도에서 의료선교를 하다 은퇴 후 1963년 캐나다 벤쿠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