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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의 부인인 로제타 홀은 1865년 9월 19일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여자 의과 대학을 졸업한 뒤, 1890년 26세의 처녀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에 파송되었다. 처음에는 스크랜톤이 경영하는 상동시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862년 6월에 홀과 결혼하였다. 1894년 5월에 이 신혼부부는 갓난 아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 숱한 박해를 겪어야 했는데 10만 평양 인구 중에 외국인이라고 오직 홀 가족뿐이었다. 평양선교의 개척자 홀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 홀의 별세 후 로제타는 미국에 돌아갔다가 1897년 다시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는데, 돌아와서 제일 먼저 기홀병원을 개원했다.
이 병원은 남편 홀의 유산과 그의 별세 후 들어온 조의금을 가지고 세운 것이다. 원장은 폴웰, 부인과장은 로제타 홀이 맡았다. 이것이 곧 평양에서는 제일 먼저 개설된 서양식 병원이다. 그 다음으로 로제타 홀은 조선 여성을 의사로 만드는 일을 한다. 박 에스더(김점동)를 1896년 미국으로 갈 때도 데리고 가서 의과 대학에 입학시켜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게 했다.
또 하나의 공헌은 맹인 교육과 농아 교육이다. 로제타 홀은 우리나라에 다시 오자, 어렸을 때 취미 삼아 배워 두었던 점자 사용법을 이용하여 한글 맞춤법에 맟추어 점자법을 만들고 맹인들을 위한 기도문, 십계명, 초등 교과서 등을 만들었다.
이것이 곧 국내 최초의 맹인 점자 교육인데 로제타는 이 사업을 맹인 기술 교육과 나란히 운영했고, 1906년에 이르러서는 정규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06년 이익민이란 사람을 중국에 파송하여 농아 교육법을 익히게 한 다음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청각장애인 학교를 세웠다.
로제타 홀은 1940년 한국을 떠나 1951년 미국 뉴저지 주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유골은 남편 홀과 딸 에디스가 묻힌 양화진에 뿌려졌다. 아들 셔우드 홀도 1991년 9월 19일 그의 유언에 따라 가족이 묻힌 양화진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