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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방 하나엔 내가 입주했고, 다른 방엔 자기 연민이 동반 입주했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면 너무 우울해 불도 켜지 못했다. 그냥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밤에 유일하게 내 곁을 지켜 준 건 밤의 소리들이었다. 아파트 밖 인공 호숫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고, 머릿속에선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기도하라고? 작년에, 아니 재작년에도 기도했지만 돌아온 게 뭔데? 이게 정말 원하던 하나님의 사랑이야?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당신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이와 비슷한 대화를 자신과 나눴는지 모르겠다. 자기 연민이 패배감으로, 그다음 절망감으로 나아가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동안 사탄은 신명나게 춤추고 돌아다니며 우리의 마음이 서서히 피 흘리는 것을, 우리 믿음의 벽돌이 하나하나 허물어지는 것을 구경한다.
자기 연민을 정의하자면, 자신의 곤경과 처지에 대한 자기 탐닉적 자세다. 얄궂게도 자기 연민은 얼핏 약자의 절규 같지만 실은 그 근원에 교만이 있다. 존 파이퍼의 말을 들어 보자.
인간의 교만의 본질과 깊이는 자기 자랑과 자기 연민을 비교해 보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둘 다 교만의 발현이다. 자기 자랑은 교만이 성공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다. 자기 연민은 교만이 고난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다. 자기 자랑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룬 게 이렇게나 많으니 선망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어.” 자기 연민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이렇게나 많이 희생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어.” 자랑은 강자의 마음속 교만이 내는 음성이다. 자기 연민은 약자의 마음속 교만이 내는 음성이다. 자랑은 자립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기 연민은 자기희생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기 연민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자기 연민은 갈채받지 못한 교만이 보이는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