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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

처음 신앙의 향기를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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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남동부의 어떤 주에서 산길을 걷다가 길가에 떨어져 있는 흰색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누군가 손으로 쓴 그 종이에는 글자가 또렷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에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성장했을 때보다 태어났을 때 더 큰 생물은 이 세상에 딱 둘이다. 하나는 말벌이고, 다른 하나는 교인이다.”
양봉업자가 아닌 나로서는 갓 태어난 말벌이 완전히 성장한 말벌보다 더 크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교인에 관한 언급은 너무도 정확했음을 알기에 나는 재미있지도,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그곳 산지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적 표현 방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이 경구의 저자가 ‘교인’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는 ‘내가 경험해 보니까,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처음 회심했을 때보다 나중에 더 크기가 작아지더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처음 회심했을 때에는 그토록 뜨거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왜 나중에는 식어 버려서 따분하고 판에 박힌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는가? 왜 처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정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성의 ‘죽은 평균 수준’에 머무는가?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신앙생활’을 그나마 이어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천상의 도성을 향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디딘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오히려 더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물론 나는 내 얘기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실, 산길에서 발견된 그 글의 저자가 모든 교인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작아지는 것처럼 말한 것은 약간 지나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일부라도 그런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의 영적 행복을 늘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또 누구라도 그런 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며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