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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나는 오늘도 주님 안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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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죽었구나.”
이 말은 신혼 초에 아내에게 처음 들은 말이다. 온유를 출산하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 도리어 아내가 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아, 오빠. 그냥 오늘은 죽었구나 생각하면 되는 거야.”
나는 강진으로 지축이 흔들리는 네팔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흙먼지 날리는 더위가 힘들고 체력이 떨어져서 힘들었지 두렵진 않았다. 고통받다가 어느 순간 아이를 낳고 행복해 하는 것처럼 네팔에서의 위험도 한국으로 돌아오면 부담을 덜 수 있는 문제였다.
며칠 동안 까다롭고 힘든 사람을 대하는 것은 그 기간에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 문제는 달라진다. 자녀 양육도 마찬가지다. 자녀들을 대할 때는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이 일 년, 이 년의 단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되어야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렇듯 하루 이틀이 아닌 일상이 되면 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다고 믿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온유가 며칠간 아파서 누워 있었다. 자녀들이 아프면 부모는 자신을 살피게 된다. 아픈 것이 모두 죄와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부모이기에 자책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내가 아플 때는 기도하지 않아도 아이가 아프면 기도하게 된다. 아이가 아프기 전까지, 보다 절박해지기 전까지 기도하지 않는 완악하고 게으르고 교만한 나 자신을 본다. 마음이 궁지에 몰리면 더욱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마저 감사하다.
여전히 온유가 배가 아프다며 누워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주님의 통치를 구하는 것, 그것은 내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거룩한 습관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 안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 가난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고, 그렇게 하지 못해 애통해 하는 마음을 주님께 드린다. 오늘 주님을 다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