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한정희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주로 해상 무역항로를 따라 아시아에 전파됐다.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인도의 고아 지역이고, 그 다음이 마카오 섬이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1557년에 중국 명나라 정부로부터 거주권을 획득했고, 1849년에는 식민지로 삼아 본격적으로 통치한 곳이다. 작은 섬 마카오는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선교사들이 중국이나 필리핀, 일본에 들어가기 전에 머물던 곳이라서 지금도 많은 성당과 유적들이 남아 있고, 그중에 25곳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의 성 바울교회는 1594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이 있던 곳인데, 현재 벽면만 남아 있고 건물들은 다 부서진 상태이다. 내부에는 박물관이 남아서 당시의 흔적을 보여 주는데, 이곳에 1597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한 대규모의 십자가형 순교 현장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누가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6명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로 3명의 예수회 선교사, 그리고 17명의 일본인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 한국인이 3명 포함돼 있는데,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세례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국에서 순교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림 속의 하늘에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로마 병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했듯이, 일본 군인들이 순교자들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십자가형을 생생히 그려 놓았다.
이 당시의 26명의 순교자를 그린 그림은 여러 본이 있지만, 이 작품이 가장 사실적이고 근접의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 바울교회의 신학대학에서는 김대건을 비롯해 3명의 한국인이 신학 수업을 받았으며, 그중 김대건이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됐다. 김대건의 동상은 마카오 시내의 한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당시 마카오에 유학을 온 김대건은 신학교에서의 인종 차별과 외로움을 소나무가 있는 뒷동산에 올라 달랬다고 한다.
그의 고향이 소나무의 동산이라는 뜻의 충청남도 ‘솔뫼’인만큼, 마카오의 소나무를 보며 고향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를 마쳤건만 귀국 후 1년 만에 체포돼 순교했다. 그의 나이 불과 25세였다고 하니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참으로 불우한 인생이라 할 수 있지만, 16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죽음을 통해 열린 수많은 열매를 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느낀다.
지금 마카오에는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없어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카지노가 번성하고 환락이 지배하는 도시 마카오가 점점 세속화되는 우리 개신교의 앞날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무척 염려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4~25)는 말씀을 다시금 새기며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한 알의 밀알이 됐으면 한다.
<나가사키 순교도>, 1640년, 성 바울교회 박물관
성 바울교회 입구 벽면, 마카오
김대건 신부 동상, 마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