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이문범 교수 (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운하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70km를 달리자, 이스트미아 협곡을 가로지르는 고린도운하가 나왔다. 이 운하는 로마로 향하는 이오니아해와 아시아를 향하는 에게해를 이어 준다. 로마에서 아시아로 항해할 때 바다로만 가려면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둘러 가면 되지만, 가는 길에 험한 해협을 지나기 때문에 위험하다.
반면, 고린도로 가면 잔잔한 바다와 빠른 길이 보장된다. 다만 고린도에서 5.8km를 가면 이스트미아 협곡을 만난다. 고대에는 운하가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내려 걸어가거나 육로로 화물을 이동해야 했지만, 이 방법이 더 안전하고 빨랐기에 고린도는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고린도는 B.C. 196년 로마에 정복됐다. 그 후 B.C. 146년 로마에 대항하다가 로마 장군 루기우스 뭄미오에 의해 멸망했다.
고린도의 중요성을 알았던 로마 황제 가이사는 B.C. 46년에 도시를 재건하고,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사람들을 로마에서 이주시켰다. 지리적 이점 때문에 단기간에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고 무역으로 번창하던 고린도는 B.C. 27년에 아가야 지방의 행정 수도가 됐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던 당시에는 인구 20만 명이 넘어 아테네의 20배 정도가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겐그리아 항구의 역할
고대 대도시에는 주로 항구가 딸려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도시보다 항구가 더 커지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에는 고린도가 로마와 아시아를 이어 주는 항구 역할을 했다. 고린도의 서쪽 레카이온에서는 로마로 향하고, 동쪽의 겐그레아에서는 아시아로 향했다.
오늘날의 겐그레아는 375년 지진으로 바다에 가라앉고 수심도 얕아져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수영을 하다 보면 맑은 바닷물 아래로 옛 항구의 유적이 많이 보인다.
지금은 바다에 잠겼지만 북쪽 부두 끝에 아스클레피온 신전과 함께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항구에서 발견된 유리 제품과 목제, 가구, 상아, 초상화 등은 이곳 주민들이 아시아, 에게해 섬과의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누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복음이 전달된 통로, 겐그레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을 고린도에서 보냈다. 이곳이 아시아와 로마를 이어 주는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 할 때, 바울은 아시아 쪽 항구인 겐그레아에서 서원했던 머리를 깎았다(행 18:18).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고, 그것을 겐그레아 여집사였던 뵈뵈에게 맡기는 장면(롬 16:1)을 보면 그의 전도 비전, 즉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수리아의 안디옥, 아시아의 에베소,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아가야의 고린도를 거쳐 로마로 가고자 하는 서원이 있지 않았을까?
바울의 전도 사역은 순서가 조금 바뀌었을지는 모르지만, 서진(西進)하며 지경을 넓혀 갔다. 그중 운하가 뚫릴 정도로 중요한 지역인 고린도는 복음의 길목이었고, 고린도의 겐그레아 항구는 아시아의 물건을 서방인 로마로 전달하듯, 복음을 아시아에서 서방 로마로 전달하는 복음의 통로로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