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지리 이문범 교수(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북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사마리아
북이스라엘은 세겜을 수도로 삼았으나, 얼마 후 수도를 디르사로 옮겼다. 디르사는 산지 깊숙한 곳에 있어 전쟁이 나면 동쪽 요단강 너머로 도망할 수 있다. 그러나 오므리가 정권을 잡으면서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다. 사마리아는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샤마르’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세멜’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사마리아는 세겜에서 북서쪽으로 11km 내려가는 산지 중턱에 있는 도시로, 이름대로 안전할 뿐 아니라 무역이 활발한 해변 길과도 가까웠다. 적의 침략을 받기도 쉬웠지만, 밖으로 뻗어 나가기 쉬운 곳에 수도를 둠으로써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은 적극적으로 국력을 키웠다.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한 후, 이 주변 산지는 도시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산지’라 부를 정도로 중요한 도시로 유지됐다.
아고라에서 사마리아인에게 전한 복음
사마리아 성문은 서쪽에 있다. 성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로마 시대 기둥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대 유적을 따라 동쪽으로 750m를 오르다 보면, 북쪽 편으로 로마 시대 아고라 광장이 넓게 펼쳐진다. 이런 환경에서 베드로와 요한, 빌립 집사가 세례를 주면서 전도했을 때 사마리아인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역사가 있지 않았을까? 아고라는 종교의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됐던 로마 시대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고라에서 서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로마 시대 원형 극장 유적이 온전히 남아 있다. 원형 극장의 왼쪽으로 올라 정상에 이르면, 이스라엘과 로마 시대의 궁전과 신전 터가 남아 있다. 남쪽 모서리 아래쪽에서 이스라엘 시대의 흔적인 여로보암 2세 때의 상아 더미가 발견됐는데, 이는 사마리아의 풍요로움을 암시한다.
성령의 통로가 된 사마리아성
사마리아 궁전 터에서 보면, 서쪽 지중해 해변 길에서 올라오는 길과 동쪽 세겜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사마리아 주변의 넓은 농경지는 성읍 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하기에 적절하다. 궁전 터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세례요한교회가 있다. 세례 요한이 참수된 후 그의 목을 이곳에 가져와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주차장 동쪽에는 세례요한기념교회 유적도 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베니게의 이세벨과 결혼한 후, 바알 신전을 세워 이 성을 타락시켰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메시지로 그나마 명맥을 이어 오던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다.
이후 혼혈인 사마리아인들이 다시 이곳에 자리 잡고 산발랏의 지도하에 도시 부흥을 일으켰으나, 유대 하스모니아의 힐카누스왕에 의해 무너졌다. 이후 로마가 오면서 가이사의 ‘아구스도’의 헬라어인 ‘세바스테’라는 도시로 번창했다.
빌립 집사는 이곳에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기도를 하자 성령님이 임하셨다. 사마리아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 이방으로 나가는 통로 역할로 쓰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