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이문범 교수(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넓은 들판에서 깊은 산골로
분열 왕국, 북이스라엘의 수도들을 둘러보고자 먼저 세겜을 찾았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아래 위치한 세겜은 동쪽의 넓은 들판과 함께, 북 왕국의 수도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한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을 보호했던 애굽 왕 시삭은 그의 첫 수도를 무참히 초토화시켰다.
이후 여로보암은 수도를 디르사로 옮겼다. 세겜의 폐허를 뒤로하고, 다시 족장의 도로를 따라 북쪽 디르사에 도착했다. 여로보암 왕은 수도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더 안전하다고 여긴 산지 깊숙한 곳, 전쟁이 나면 동쪽 요단 강 너머로 도망할 수 있는 디르사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한 왕국의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지의 초라한 모습에서 북 왕국이 소극적인 정책을 폈던 시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전을 보장했던 사마리아 성
차를 몰고 성을 향해 가면서 사마리아가 급경사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키다’라는 뜻의 ‘세멜’에서 유래한 사마리아(왕상 16:24)라는 성 이름이 이런 지형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여로보암의 가족을 바아사가 죽이고, 바아사의 가족을 시므리가 죽이고, 시므리를 오므리가 죽였다. 정권을 잡은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는데, 오므리는 이곳에 수도를 이전함으로써 안전하면서도 원활하게 무역할 수 있는 바닷가를 통제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썼던 것 같다.
사마리아 성문에 들어서니 성경에 기록된 나병 환자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왕하 7:3~20). 아람 군대에 의해 사마리아 성이 포위돼 모두가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됐을 때, 성문 어귀에 따로 기거해야 했던 나병 환자들은 굶어 죽든지, 적군에 의해 성이 함락돼 죽든지 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람 군대에 항복하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아람 군대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성에 알려 모두를 살린 것이다.
백성의 감격과 기쁨의 함성이 가득했을 그날을 상상하며 길게 늘어선 기둥을 따라 사마리아 성에 들어서니, 로마 시대에 사용한 광장이 펼쳐진다.
바알 숭배로 멸망의 길을 걷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베니게의 이세벨과 결혼하고, 그곳에서 가져온 바알의 신전을 세워 이 성을 부패하게 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메시지를 통해 그나마 명맥을 이어 오던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3년을 버텼지만 허사였다.
혼혈인 사마리아인들이 다시 이곳에 자리 잡고 산발랏의 지도 아래 부흥을 일으켰지만, 유대의 하스모니아의 힐카누스 왕이 이들을 멸망시켰다.
그러다 예수님 당시에 세바스테라는 도시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빌립이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들에게 와서 안수기도를 하자 성령님이 임하셔서 다시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시가 됐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사마리아 성은 이름대로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좋은 안전한 성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안전한 성도 스스로를 지키지는 못했다. 다윗의 고백처럼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시 121:5).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