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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바울, 데살로니가를 정복하다

과월호 보기 이문범 교수 (사랑누리교회, 총신대학원 성지연구소)

영토의 심장, 데살로니가
마게도냐 최대 도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아버지의 이름,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의 이름,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여동생의 이름이다.
데살로니가는 풍요로운 농산품을 육로와 해로로 수출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한때 이곳에 유배된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BC 106~43년)는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불렀다. 데살로니가는 BC 42년경 벌어진 이집트와 로마 간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 가담한 공로로 자유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해변에 그대로 있는 높이 32m의 ‘화이트 타워’는 15세기 베네치아인이 만들어 놓은 방벽의 일부로, 터키 점령 시대에 감옥으로 사용됐으며 ‘피로 물든 탑’으로도 불린다.


바울의 개척로를 따라
화이트 타워에서 북동쪽으로 난 큰길을 따라 650m 지점에서 좌회전하면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른 고대 에그나티아 가도가 있다. 그리고 180m 지점에는 기독교 공인 직전에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이 있다. 이 문은 297년 페르시아 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로마의 전적을 기념한 것이다.
개선문에서 오른쪽 130m 지점에는 300년경 갈레리우스 황제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로톤다’라는 거대한 원형 건물이 있다. 이는 후에 교회와 사원으로 사용됐다. 개선문에서 750m를 더 가면 유적들과 공원이 나오는데, ‘로만 아고라’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이 사도행전 17장 5절에 언급된, 시장을 뜻하는 저자, 즉 ‘아고라’다.


데살로니가 아고라의 소동
데살로니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늘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발칸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기고 집중 공략했다. 3주 정도 지나 큰 부흥의 기운이 있었으나 유대인의 방해로 떠나야만 했다(행 17:5; 살전 2:14~16). 안식일에 전도했다면 세 번 정도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교회가 굳건히 섰다.
바울이 교회를 세우자 유대인이 불량배를 아고라로 끌어들였다. 야손의 집에 찾아가 바울을 찾아내려 한 그들이 재판을 벌이던 곳, 데살로니가의 아고라는 그 시대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바울은 유대인의 박해로 피신하는 와중에도 디모데와 실라를 마게도냐지역에 남게 해 아직 복음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굳건히 서 있다는 말을 듣고 힘을 얻어 고린도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선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두 편의 편지를 썼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실천해 주변 지역에 모범이 됐다. 바울은 주님 오실 날을 갈망하던 그들에게 그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따라 살았다. 바울은 이처럼 알렉산더 아버지의 마을 빌립보와 그의 여동생 마을인 데살로니가를 복음으로 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