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십대, 감정의 블랙홀에 갇히다
“깔깔깔!”
길을 걸어가던 십대 여자아이들이 갑자기 숨이 넘어가듯 웃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강아지의 무늬 때문이었다. 그렇다. 십대의 웃음에는 그리 큰 이유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애는 ‘짜증 나’를 입에 달고 살아요.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도 있고요.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진짜 화가 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아이가 휴대폰을 만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오열을 하는 거예요. 간식 때문에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도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요.”
주일학교 모임에서 한 여학생이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미 십대의 시간을 지나온 어른들은 망각의 물을 마셨는지 십대의 급작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당황스러울 뿐이다. 문제는 십대들도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감정의 이유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십대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기차는 언젠가는 멈춘다는 것을 말이다.
#2. 십대, 감정을 일으키는 게 뭔데?
심리학자 최성애 박사는 “감정을 조절해 주는 세로토닌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사춘기에는 아동이나 성인에 비해 적게 나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십대의 갑작스러운 기분 변화는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신경 전달 물질들의 수치에 의한 것이다. 십대는 아직 전두엽이 미성숙해서 이런 신경 전달 물질의 충동에 쉽게 굴복한다. 여러 요소들을 종합해 볼 때, 상황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십대의 감정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1900년대 초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와 칼 랑게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프고,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기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제임스-랑게 이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1960년대 초, 톰킨스와 몇 명의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얼굴을 조작하면 그 특정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일명 ‘안면 피드백 가설’을 주장했다.
이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독일의 심리학자 스트라이크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볼펜을 이로 가볍게 물게 한 사람들과 입술로 물게 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만화를 보여 주고 감상을 말하게 한 것이다. 실험 결과, 이로 볼펜을 문 참가자들이 만화를 더 재미있게 평가했다. 결국 얼굴 표정이 감정을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3. 십대, 힘들어도 웃을 수 있는 이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부터 18절 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두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말씀이다. 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항상 기뻐하기보다는 항상 불평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데 그냥 푹 쉰다. 또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주 원망을 한다. 성경은 이것이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하지만 여전히 십대는 ‘잠재적 원망’을 가슴에 품고 기쁨보다는 불평을, 기도보다는 요구를, 감사보다는 원망을 내뱉는 삶에 더 익숙해 보인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3).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자신의 감정조차 마음대로 안 되기에 십대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다. 기쁨과 웃음의 유일한 이유는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웃자! 십대들이여! 예수님으로 인해 할 수 있는 한 한껏 웃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