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십대, 실망의 터널 속을 걷다
“엄마가 저보다 언니를 좋아해요. 언니는 착하고 쓸데없는 데 돈도 잘 안 쓰기 때문이죠. 그런데 전 엄마의 태도에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그래서 하루는 용기 내서 엄마에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너랑 언니랑 어떻게 같아!’라고 하시는데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었어요.” <여중생 A의 편지 중에서>
“최근 몇 개월 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한 것 같아요. 모두에게 친절했지만 정작 제 자신에게는 친절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제가 베푸는 친절만큼 사람들은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지도 않았거든요. 물론 그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저는 제게 실망했었나 봐요.” <여고생 B의 편지 중에서>
3년 전에 받은 편지의 주인공들은 이제 더 이상 십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실망 중이다.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하던 작은 천사는 사라졌다. 엄마를 영원히 지키겠다던 꼬마 보디가드는 온데간데없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한 자들이 나타났다. 십대는 지금 ‘실망’이라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
#2. 십대, 손을 잡아 주세요
우울한 사람의 전두엽은 부정적인 사고로 가득하다고 한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전두엽은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런데 십대들의 전두엽도 아직은 미성숙하다. 그래서 십대는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을 경험한다.
긍정의 심리학을 주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동물의 실험을 통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것에 빠진 사람은 ‘난 무능력하니까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일종의 체념과 무력감이 몸에 배어 실망과 포기를 반복하고, 다시 도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십대들은 자주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그리고 자신이 의지했던 어른들에게도 실망한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뇌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사회적 문제와 구조적 어려움이 만드는 무력감을 십대들에게 떠넘기는 어른들의 잘못일 수도 있다.
#3. 십대, 영웅 옆에 앉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시험하는 자’가 40일간의 금식을 막 끝낸 예수님께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배고픔을 참지 말고 주변에 널려 있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시험한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시험하는 자’가 이번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 보이라고 예수님을 유혹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는 예수님을 부추겨 반복되는 실패에 빠뜨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하는 자’의 요구가 십대들이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시험하는 자는 십대에게도 슈퍼 히어로의 드라마틱한 모습을 부추겨 실망을 경험하게 하려 한다.
“한번 보여 주세요. 하나님이신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주세요. 제 기도에 응답해 주세요. 제가 다른 것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위대하고 대단한 것을 보여 주세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채 이런 극한을 요청하는 십대들을 묵묵히 사랑하신다.
필립 얀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하나님은 의를 위해 복수하기보다는 의가 성장하도록 기다리는, 느리고 달갑지 않은 방식에 만족하시는 것일까? 그게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는 가장 유일한 방법 말이다.’
십대들은 오늘도 실망한다. 세상이 나를 알아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은 너무 느리다. 그리고 영웅을 기다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화의 슈퍼 히어로처럼 나를 데리고 날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항상 십대들의 곁에 계신다. 우리의 영웅은 항상 옆에 있었다.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