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십대, 혼자 공감하다?
‘구독, 구독~’, ‘좋아요, 좋아요.’
‘1,000뷰 찍은 기념으로 특별 콘텐츠를 준비했습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조회수와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십대들은 ‘구독 구걸’에 열심이다.
십대들은 자신이 올리는 영상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감정을 공유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십대들은 혼자 뜨겁다.
십대들은 오늘도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로 공감하기를 원한다. 공감되지 않는 현실에서 공감을 열망하는 십대들은 오늘도 카메라 앞에서 혼자다.
#2. 십대, 공감 본능 스위치 ON?
이탈리아 파르마대학교 소속의 신경 과학자 지아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는,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때 마치 거울을 보는 것같이 즉각적으로 활성화되는 뇌의 신경 세포를 ‘거울 신경 세포’(mirror neuron)라고 명명했다. 거울 신경 세포는 상대방이 행할 일련의 행동 중 일부분만 관찰해도 행동 전체를 알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거울 신경 세포의 능력이 극대화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상대방의 행동 또는 느낌을 알거나 알아맞힐 수 있다.
바로 이 신경 세포를 통해 ‘공감 본능’의 스위치를 켤 수 있다고 리촐라티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신경학 연구에서는 누구나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3. 십대, 친밀함으로 서로 공감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다윗은 혼자였다. 이미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고, 죄로 인해 폐위될 사울을 이어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사울의 신하였고, 게다가 왕의 미움과 시기를 받는 천덕꾸러기였다.
그런데 이때 그와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요나단이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 괴롭힘과 위협을 당하는 다윗에 깊이 공감하며, 친밀함으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미움과 비난 속에서 다윗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요나단의 공감이었을 것이다. 공감이 사랑을 동반할 때, 그 힘이 배가된다. 그리고 그 힘은 나와 다른 사람을 새롭게 한다. 다윗은 요나단과 함께 있을 때,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른 존재가 됐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려졌고, 아버지 야곱에게 잊혔으며, 심지어 군대 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누명을 써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버림받아 온 낯선 땅에서 또다시 버림받은 것이다. 억울한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시며 그에게 공감해 주셨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7).
강도 만난 이웃들은 오늘 밤도 서울역으로 모여든다. 갈 곳 없는 그들은 추운 몸을 녹일 따뜻함과 마음을 나누는 함께함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곳에는 마음을 함께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나 보다.
강도 만난 이웃은 십대들의 교실에도 등장한다.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차림새로 자신들의 상처를 가리고 있지만, 십대들은 강도 만난 이웃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이 돼, 그 이웃을 잘도 피해 간다.
‘십대’는 ‘사마리아’란 이름과 닮았다. 십대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마리아인처럼 멀리하고 싶은 존재인가 보다. 그래서 십대의 이름 앞에는 ‘선한’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서로 공감하고, 친밀함으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다윗과 요나단’이 십대여야 한다. 선한 십대들이여! 이와 같이 행하라!
참고 자료: 《나도 나를 모르겠다》, 권수영 저, 레드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