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
“엄마! 배가 아파서 오늘 학교 못 가겠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꾀병으로 생각되는 병이 초딩과 중딩 사이에서 전염되기 시작한다.
“우리 예쁜이는 어쩜 이렇게 밥을 잘 먹을 수가 있을까!”
과거 십대들은 밥만 잘 먹어도 엄청난 칭찬을 받았다. 또 말도 안 되는 막춤조차도 어떤 아이돌의 칼군무보다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공부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과 여기저기 불평 가득한 외모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경쟁해야 하는 시대 속에서 한숨만 나온다.
십대는 지금 지쳐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렵다.
십대, 미움에 갇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그의 책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자격을 갖추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미움받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의미다. 어떤 사람이 사랑받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미움받는 것을 행복해하겠는가?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자신이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깊은 절망으로 인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비판하게 된 십대들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의도치 않게 공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민한 십대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 세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십대는 앙상한 가지와 가시만 남은 가시나무처럼 너무나 고독하다. 사랑받고 싶어 경쟁의 늪으로 빠져 버린 십대는 결국 열등감에 빠진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무기력증으로 연결된다.
미움을 이기는 비밀 병기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엘리야는 당시 아합왕과 이세벨의 지지와 지원을 받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다. 엘리야는 승리의 잔치를 열고 기쁨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큰 승리를 잊고, 아합왕과 이세벨의 미움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패배한 이세벨의 저주와 위협이 그를 광야에 가뒀다.
도대체 승리자 엘리야의 패배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때로는 한 사람을 향한 미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밀쳐 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적인 능력과 기도 응답에도 불구하고, 미움으로 인한 열등감과 무기력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십대에게 찾아와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요 21:3a).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제자들을 만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무지와 오해로 십자가를 덮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기억한다.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사랑과 환대는 미움으로 바뀌었다. 그 미움은 베드로를 제자의 삶이 아니라 바다로 다시 밀어내고 가두려 했다. 미움으로 무기력해진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를 살렸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미움을 몰아냈다. 이제 베드로는 자유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는,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미움은 물러가고 생명의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제 십대는 미움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