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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열심의 수고가‘사랑’에 닿게 하라!

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행복은 성적순이잖아요!
“이번 시험 망했어요! 기말고사 평균이 68점이에요. 이 성적으로 제 인생은 끝이에요!”
시험을 마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젠 시험 점수와 등수가 십대를 괴롭힌다.
“목사님! 목사님! 어떡하면 좋아요?”
아이는 절망감과 패배감으로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국어를 망쳤어요. 두 문제나 틀렸거든요.”
이 아이는 국어 시험에서 두 문제를 틀려 또 전교 2등이 됐다. 1989년 상영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대사가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십대 청소년들은 성적으로 인생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한다. 성적은 십대의 행복(?) 기준이란다.


우등과 열등, 메타인지로 구분되다!
2014년에 EBS 교육 방송에서 <학교란 무엇인가: 0.1%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3천 개의 고등학교 가운데 전국 순위 1등부터 800등까지 학생들을 모아서 ‘전국0.1%’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과거에는 IQ 지수로 사람의 지능을 나누고, 상위권과 하위권을 구분했으나, 지금은 IQ도 너무 옛말이 돼 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나 보다.
그러다가 찾아낸 단어가 바로 ‘메타인지’ (Metacognition)다. 메타인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0.1%의 상위권 학생들은 스스로 이 사실을 알고 이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것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여전히 ‘메타인지’와 상관없는 99.9%에 속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우월감’을 열등감의 보상으로 여기는 순간 모든 불행은 시작된다.”           - 아들러

문제는 메타인지라는 단어 자체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인식하는 자기 인식과 관련된 것인데, 사람들은 메타인지를  또다시 99.9%와 0.1%를 구분해 서로 비교하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단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메타인지는 IQ를 대신하게 됐다. 


사랑의 수고로 답하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9:33~34).
“무슨 소린가? 지난번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잊었는가? 내가 예수님이 원하는 인재상이란 말일세.”
“말도 안 되는 소리! 예수님께서 나를 가장 먼저 제자로 부르셨단 말일세. 그러니 당연 내가 으뜸이지!”
1등이 되기 위한 논쟁, 내가 더 우월하다는 논쟁이 제자들 사이에도 일었다. 누가 더 큰지 자기들끼리 등수를 매겨 본다. 행여 자신이 상대보다 낮아질까 봐 목청을 높인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마 27:20).
한편,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상위 0.1%라는 우월감은 모든 이들의 아픔을 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눅 23:34). 우월감을 좇는 것은 제자들을 싸우게 하고 예수님을 못박는다.
십대여,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아는 자들이 내가 복음을 먼저 알거나 더 잘 안다는 ‘우월감’의 함정에 빠지길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오직 복음에 대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복음의 메타인지’를 원하신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을 알고자 노력하고, 나아가 복음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알리는 노력을 쏟길 원하신다. 주님은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을 행함으로 믿음을 단단히 하고, 묵상으로 모르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0.1%에 들어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집착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 결국 집착은 ‘후회’로 썩어질 것이고(갈 6:8), 수고는 ‘사랑’을 낳을 것이다(살전 1:3).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