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십대, 짜증나는 세대!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할 때, 아플 때, 배고플 때, 일이 안 풀릴 때, 공부가 안 될 때….
십대는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낸다.
형이 간섭할 때, 공부하는데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실 때, 동생이 내 방을 어질러 놓을 때, 부모님과 싸울 때, 엄마가 언니 편들 때, 부모님께 오해받을 때….
십대는 집에서도 짜증을 낸다.
늦었는데 버스 기사님이 천천히 운전할 때, 로딩 화면이 99%에서 멈춰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일을 방해할 때, 내 물건을 함부로 쓸 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을 때, 이유 없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할 때, 친구가 약속을 계속 미룰 때, 심한 말을 들을 때, 힘든 상황에서 말 걸 때, 상대가 내 말을 끊고 정색할 때, 내 말을 듣고 무시할 때, 필요할 때만 나를 찾을 때, 실수를 사과하지 않고 우길 때, 무조건 괜찮다고 할 때, 귀찮게 할 때, 친하지도 않은 친구가 장난으로 시비를 걸 때….
십대는 오늘도 모든 곳에서 짜증을 내는 중이다.
짜증은 왜 나는가?
‘짜증은 엄밀히 말하면 분노는 아니다. 사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짜증은 이러한 범주에 알맞게 딱 떨어지지 않는 감정이다. 짜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감정인 듯하다.’
짜증은 왠지 십대를 닮았다. ‘분노’라는 범주에 넣자니 그 힘이 너무 작고, ‘불안’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유지 시간이 너무 짧다.
‘우리는 짜증나는 상황을 싫어하지만, 무엇이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즐기는 듯하다. 누구나 짜증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왜 짜증이 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왜 짜증나는가』라는 책의 한 대목이다.
너무나도 흔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감정은 십대가 겪는 일상과 흡사해, 십대를 수식하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 짜증은 십대 얼굴에 핀 여드름이 됐다.
짜장면 한 그릇을 권하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는 음식 준비로 바쁘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이 그녀의 집에 오셨고,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고, 손님을 위한 자리도 마련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마르다의 마음에 원치 않던 감정이 생겨났다.
그때 눈에 들어온 여동생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 경청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왠지 모를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은 익숙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아! 짜증나! 쟤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여자면 여자애답게 음식을 만들어야지. 거기는 남자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란 말이야.’
분주함으로 목적을 잃어버린 마르다의 얼굴에 짜증이 피어났다. 그러자 섬김(눅 10:38)의 기쁨은 억울함이 됐고, 성령을 따라 시작한 것이 육체의 것이 됐다(갈 5:17, 20). 그녀는 누구보다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예수님 앞에서 짜증을 울컥 쏟아 냈다. 마르다도 짜증을 냈다.
오늘도 십대는 짜증과 그에 따른 후회로 인해 불편하다. 선한 의도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과 일상의 분주함으로 고개를 내미는 짜증은 지금도 십대의 얼굴에 피어난다.
하루는 모든 일에 짜증이 나 부모님도 모르게 가출한 십대 아이가 찾아왔다. 쏟아 내는 아이의 짜증에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어 짜장면 한 그릇을 권했다.
아이는 짜장면을 비우고 난 후, 다시 부모님 몰래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큰 짜증도 달고 짭조름한 짜장면 한 그릇을 먹는 동안에 다 사라진다.
“십대들이여! 짜증날 땐 짜장면!”Q
참고 자료 : 『우리는 왜 짜증나는가』 조 팰카, 플로라 리히트만 지음.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