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 교회사

2017년 03월

아아! 마사다

흥미진진 교회사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Hash Tags  #마사다 #예루살렘 #유대로마전쟁 #요세푸스 #티투스장군


반란의 시작
절대 제국 로마의 폭정은 가혹했다. AD 64년에 유다에 부임한 로마 총독 플로루스는 어마어마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을 탐냈다.
무자비한 총독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유대인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은 군대를 조직하고 로마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장 투쟁도 불사하던 셀롯당(열심당)이 그 선봉에 섰고, 로마에 대한 분노를 가득 품은 유대인이 동참했다.
반란군은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던 로마 요새를 공격했다. 로마 12군단은 유대 반란군의 거센 공격에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제국의 변방에서 들려온 심상치 않은 반란의 소식은 로마의 황제 네로에게까지 들려왔다. 네로는 제국에 반기를 든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황제가 된 장군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 황제로부터 유대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군은 아들 티투스와 함께 6만 군사를 이끌고 출격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티투스를 만난 유대인 요세푸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은 로마의 황제가 될 것입니다!”
이 황당한 예언이 현실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폭군 황제 네로가 자살을 한 것이다. AD 68년,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원정을 중단하고 새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다. 사령관이 된 티투스는 아버지가 남긴 미션, 즉 유대 반란을 응징하려고 다시 유대로 향했다.
유대인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8만 명의 로마 정예 부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포위됐고, 식량과 물자 공급이 끊어진 채로 다섯 달이 흘렀다. AD 70년,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사령관에게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한 덕에 역사가가 된 요세푸스는 이 참혹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굶주린 사람들은 손에 닿는 대로 뭐든지 씹어 먹으려 들었다. 짐승도 쳐다보지 않는 쓰레기를 주워 음식으로 삼았다. 마지막에는 허리띠와 신발, 방패에서 벗겨 낸 가죽까지 씹어 삼켰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중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됐다. 수만 명의 유대인이 굶어 죽거나 살육됐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 광산이나 검투장에서 희생됐다. 예루살렘 성전은 한쪽 벽만 남겨 둔 채 처참히 불타 버렸고, 유대인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 부르며 아픈 역사를 되새긴다.
4년이나 계속됐던 유대-로마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로마는 유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티투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포로 로마노 광장에 거대한 개선문을 세웠다. 위풍당당한 티투스의 모습은 개선문의 조각으로 새겨져 오늘날까지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이 전쟁이 끝날 무렵,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뜻밖의 장소에서 일어났다.




비운의 요새, 마사다
마사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장엄한 요새는 그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품고 있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부의 유대 광야 동쪽에 있으며, 해발 434m 높이로 사해를 바라보고 우뚝 솟아 있다. 마사다의 남북 길이는 600m나 되며, 75만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12개의 저수지를 갖췄다. 헤롯 왕이 건설한 이 요새는 아름다운 테라스를 자랑하는 화려한 저택과 로마 스타일의 목욕탕, 견고한 성벽을 자랑한다. 예루살렘이 함락됐을 때, 유대인 반란군이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마사다였다. 천하의 로마군이었지만 거대한 절벽 위의 요새를 공략하기란 쉽지 않았다.
로마와 유대, 서로의 자존심을 건 항전은 2년이나 계속됐다. 마침내 로마 10군단은 최후의 방편을 선택했다. 높이 솟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마사다와 같은 높이의 성채를 쌓기 시작한 것이다. 유대인은 공사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로마군은 상대편의 동족인 유대인을 노예로 동원해 공사를 계속했다. 차마 같은 민족을 공격할 수 없었던 유대인은 성채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성채가 완성됐고 로마군은 경사로를 타고 마사다 요새 진입에 성공했다. 끝까지 저항했던 유대인 960명은 자살을 택했다. 그것이 유대인으로서의 신앙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성전 건물을 자랑스러워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은 그대로 성취됐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이 성전을 향해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 분노하고 저주했던 유대인들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눈물 흘리며 탄식하던 예수님의 모습이 못마땅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소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과 유대 독립 전쟁의 패배. 이 비극의 역사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 모세의 율법, 제사의 규례, 오랜 전통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각자의 길을 가다
처참하게 불탄 예루살렘 성전과, 무너져 내린 마사다 요새는 수치와 굴욕을 당한 유대교의 상징이었다.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한 막강한 군사력의 로마군도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는 못했다.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고난 중에도 부활의 소망으로 소생하는 기독교는 유대교와 결별하고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온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벽돌로 지은 성전보다 더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면 그 사람이 성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교회의 역사는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다.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