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 교회사

2026년 05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한국을 사랑한 언론인 베델의 강한 펜

흥미진진 교회사 김예성 목사(사랑의교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죠.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었던 일본 제국주의는 표현의 자유는 물론, 한국의 외교권까지 빼앗아 갔어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독립을 소망하는 한국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이에 적극적으로 가세한 한 언론인을 보내 주셨어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 준 베델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언론을 이용한 항일 운동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1872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어요. 베델은 16세까지 영국에서 살며 공부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무역 회사를 운영했어요. 그런데 1904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이 전쟁은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베델은 <런던 데일리뉴스>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발을 디디게 됐어요.

베델은 한국에서 취재 활동을 하며 일본이 한국인을 탄압하고 통제하는 모습을 직접 봤어요. 그래서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자 민족 지도자인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영자 신문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 한글과 한자가 함께 쓰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본의 음모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일본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표현의 자유를 탄압했어요. 다른 신문사는 발행을 정지당하는 등 일본의 탄압을 받았지만, 베델은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어요.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폭로하는 친서를 실었고, 신문은 일본의 탄압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어요.

한편 일본은 한국에 돈을 많이 빌려줬어요. 이것을 구실 삼아, 한국의 경제를 손아귀에 쥐려는 속셈이었죠. 이를 알아챈 사람들은 나라를 대신해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어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크게 보도해, 이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데 크게 일조했어요.

 

거듭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사사건건 일본을 비판하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는 나날이 인기가 높아졌고, 이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였어요.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을 압박해 베델을 재판정에 세웠고, 영국은 베델을 상하이의 감옥에 3주간 가두라는 판결을 내렸어요. 또한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의 공동 경영자였던 양기탁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신문사에서 쫓아냈어요. 양기탁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됐지만, 신문사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물러나게 되자 <대한매일신보>는 휘청거리게 됐어요.

베델은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고 심장병을 얻어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소천하고 말았어요. 베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어요. 그러나 베델을 너무나 미워했던 일본은 비석을 깎아 글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해 버렸어요. 그뿐 아니라 인지도가 높았던 <대한매일신보>를 빼앗아 ‘대한’이라는 제호를 빼 <매일신보>로 바꾼 후 일본을 찬양하는 기사만 싣도록 했어요.

일본이 지워 버린 베델의 비문은 광복 20년이 지난 후에야 베델의 후예인 한국의 언론인들이 힘을 모아 다시 새겼어요.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꿈

베델은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에 와서 일본의 불의에 저항해, 신문까지 발행하며 한국을 도운 의로운 사람이었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에 감사하며, 건국 훈장을 수여했죠. 베델은 죽기 전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라고 유언했어요.

베델은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이 간절히 필요로 했던 것을 주고 떠났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바람처럼, 한국을 눈부시게 발전시키셔서 어려운 나라를 돕는 나라로 만드셨죠. 이처럼 하나님의 꿈은 현실과 상황을 뛰어넘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 주신 꿈은 무엇인가요? 그 꿈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제자가 되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