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 교회사

2026년 09월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윌리엄 제임스 홀, 3년 동안 모든 것을 불태우다!

흥미진진 교회사 김예성 목사(사랑의교회)

<큐틴> 친구들도 북한을 위해 많이 기도하죠? 지금은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북한의 수도 평양은 한때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어요. 평양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기틀을 마련한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선교에 관심 없던 홀, 하나님께 부름받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60년 캐나다에서 태어났어요. 의사가 되고 싶었던 홀은 뉴욕의 벨레뷰 의과 대학에 진학했어요. 당시 의대생들은 의료 선교사로 섬기는 것에 관심이 많았지만, 홀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부흥사 무디의 집회에 참석한 홀을 선교사로 부르셨어요. 부르심에 즉시 응답한 홀은 대학을 졸업한 뒤, 북감리교선교회를 통해 선교사로 파송받았어요.

홀 선교사님은 1891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어요. 그리고 멀리 의주까지 여행을 떠났어요. 홀 선교사님은 서민들이 먹는 낯선 음식도 맛있게 먹으며 한국 상황을 살폈어요. 평양이 선교할 만한 곳이라는 확신을 얻은 홀 선교사님은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자원해, 역시 의료 선교사였던 아내 로제타 선교사님과 함께 한 손엔 청진기를, 한 손엔 성경을 들고 평양으로 떠났어요.

 

홀과 로제타, 평양에 헌신하다

홀과 로제타 선교사님이 사역하던 평양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금지된 곳이었어요. 평양에도 복음이 뿌려지길 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홀 선교사님 부부를 보내신 것인지도 몰라요. 홀 선교사님 부부는 먼저 집을 한 채 마련해 아픈 사람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평양을 책임지던 평양 감사는 홀 선교사님 부부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홀 선교사님 부부는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어요. 평양에서 홀 선교사님을 돕던 사람 중에는 한국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으신 김창식 목사님도 계셨어요.

1894년, 한국 역사를 뒤흔든 청일전쟁이 벌어졌어요. 이 전쟁은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한국 땅 평양에서 벌어졌죠. 전쟁 때문에 잠시 평양을 떠나 있던 홀 선교사님은 평양으로 돌아와 부상자와 성도들을 돌보다가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아요. 급히 서울로 이송돼 진료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마세요. 고작 3년 동안 사역한 홀 선교사님이 숨을 거둔 뒤, 평양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복음의 씨앗, 풍성하게 열매 맺다

하나님께서는 로제타 선교사님을 통해 평양에 계속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어요. 로제타 선교사님은 남편 못지않은 열정으로 한국을 위해 일했어요. 의사로서 한국인을 섬기며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처음 만들고 평양에 병원을 건립했으며, ‘조선여자의학강습소’(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를 세워 여성 의사 양성에 힘썼어요.

홀 선교사님 부부의 한국 사랑은 자녀 세대까지 이어졌어요. 아들인 셔우드 홀 선교사님 부부 역시 의사로서 한국을 위해 헌신했는데, 특히 결핵 퇴치를 위해 힘썼어요. 결핵에 걸리면 잘 먹고 푹 쉬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얘기였죠. 그래서 셔우드 선교사님은 황해도 해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치료 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하며,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치료를 위한 기금을 모았어요.

셔우드 선교사님은 일본의 박해로 강제 추방될 수밖에 없었지만 인도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이어 갔어요. 그리고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모님, 아내와 함께 한국에 묻혔어요. 홀 선교사님의 열정은 이렇듯 우리나라에 엄청난 열매를 맺었어요.

홀 선교사님은 짧은 기간 최선을 다해 한국을 섬겼고, 하나님께서는 그 열정을 이어받은 홀 선교사님 가족을 평양, 나아가 한국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어요. 홀 선교사님 가족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실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린 향유였죠. 친구들도 받은 은사를 기쁘게 드리는 향기로운 기름이 되길 축복해요!